최근 티빙을 다시 결제했다. ‘어거지로 구독하는 넷플릭스조차(어쩌다보니 넷플릭스 가장이다) 보는 게 거의 없는데’ 라며 다른 OTT 플랫폼은 쳐다도 보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크라임씬’ 시리즈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원체 추리물을 좋아는 편이고 우리 나라에서 매우 귀한 추리예능인 만큼 이 시리즈를 싫어했을 리 없지만, TV를 잘 안 보는 데다(집에 TV도 없다) 주 1회 방영을 나중에 챙겨보기도 쉽지 않았다. 시리즈물을 잘 안 보다 보니 시즌 2도 드문드문 보다가 나중에야 겨우 다 봤고, 시즌 3부터는 기억에서 잊고 살았다.
그러던 중 넷플릭스에서 ‘크라임씬 제로’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찾아서 보기 시작했는데… 아, 그래 이 맛이지! 요즘 내가 많은 것을 내려놓아 심적 여유가 생긴 탓도, 넷플릭스의 자본과 스타일로 더 깔끔하고 강렬해진 탓도 있겠지만, 정말 너무… 재밌다. 결국 짧디짧은(아무리 에피소드 하나에 2화라지만 에피소드 5개가 뭐니 5개가! ) 넷플릭스 시리즈만으로는 만족 못 하고, 그간 못 본 시즌 3과 티빙에만 있는 ‘리턴즈’를 보러 다시 티빙을 결제하고 말았다. (티빙에 가보니 ‘리턴즈’는 물론이고 시즌 2, 시즌 3까지 역주행하며 순위권에 올라 있었다. 다들 같은 마음인 거다.) 나는 추석 연휴 내내 넷플릭스와 티빙의 ‘크라임씬’을 정주행했고,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에피소드를 아껴보고 있다. 다음 시즌이 언제 나올지 모르니 그저 줄어드는 게 아까울 뿐. 너무 좋고, 적당히 웃긴, 훌륭한 추리 예능이다. 내가 뭔가 영상 컨텐츠를 이렇게 열심히 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난다. 보아하니 반응도 좋은 것 같다. 좋은 일이다.
신나서 프로그램을 보다 보니 코멘터리 및 이런저런 기사까지 찾아보게 되었다. (사실 나는 ‘리턴즈’ 소식을 제대로 못 들었거나, 들었어도 정신없을 때 흘려들었을 것이다. 완전히 놓치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이 늘 이렇게 사랑받았던 것은 아니다. 시즌 3 이후 6~7년 만에 티빙 오리지널로 ‘리턴즈’가 나왔고, 그 직후 넷플릭스와 계약해 새로운 시리즈(제로)가 나오게 된 것이다. 시즌 3 당시 인터뷰를 보면, 열성 팬은 분명 있지만 시간 및 제작비 여건상 만들기 어렵고, 그렇게 만들어도 시청률이 잘 나오지 않아 다음 시즌 제작이 늘 불투명했다. 시즌 3 때는 다음 시즌은 어려울 거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렇게 하나의 매니악한 프로그램으로 사라질 수도 있었다.
과거에는 높은 시청률이 중요했다. 성공하려면 ‘프라임 타임’에 편성되어 최대한 많은 사람이 쉽게 보도록, 한 가구의 TV 화면을 차지해야 했다. 이런 시장에서 ‘크라임씬’은 불리했다. 다소 잔인할 수 있는 사건, 누군가에게는 머리 아플 추리 게임은 ‘우연히 채널을 돌려도 무난하고, 온 가족이 함께 봐도 괜찮은’ 스타일이 아니었다. 프라임 타임을 차지할 수도 없었고, 한 집에서 화면을 공유하는 데도 무리가 있었다. 이는 결국 좋지 않은 ‘시청률’로 나타났고, 해외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열광적인 팬을 만들어도 결과적으로 ‘시청률 낮은 실패작’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OTT가 부흥하고 사람들의 시청 패턴이 달라지면서, 영상 콘텐츠 산업 자체가 빠르게 변화했다. ‘시청률’이라는 다소 모호했던 지표는 예전만큼의 힘을 잃었다. 특정 시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TV 앞에 앉아있는지가 콘텐츠의 성공을 좌우하지 않게 되었고, 광고주들도 TV 시청 규모만을 고려할 수 없는 시대다. 보다 정확한 시청 시간(View Hour)을 기본으로, 시청자 수, 시청 완료율, 신규 가입 기여도(가입 후 첫 시청 콘텐츠 등으로 추정), 반복 시청자 수 등의 지표를 종합적으로 평가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평가 기준이 달라지면서, 프로그램의 흥망성쇠를 판단하는 개념 역시 달라졌다. 패러다임이 바뀌고 OTT가 등장하면서 과거의 공식은 무너지고, 새로운 성공 방정식이 등장했다. 더 이상 ‘프라임 타임’은 존재하지 않고, 시청 기기도 다양해져 각자의 취향에 맞는 영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원한다면 몇 번이고 다시 볼 수 있고, 그 시간은 모두 프로그램의 성공 지표에 반영된다. 특정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플랫폼을 결제한다면, 이 역시 지표에 기여한다. 이는 기존의 ‘시청률’과 완전히 다른 성공작을 만들어낸다. 티빙과 넷플릭스에 연이어 새 시즌이 부활하고, 높은 시청 시간과 순위를 기록하며, 티빙 유료 구독 기여도 상위권에 오른 ‘크라임씬’ 시리즈는 이제 누가 봐도 ‘실패작’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나만 해도 그렇다. 넷플릭스를 구독하면서도 열심히 보는 작품은 손에 꼽았는데, ‘크라임씬’은 에피소드가 올라오자마자 바로 소비했고, 이전 시즌을 보기 위해 망설임 없이 티빙을 결제했다. OTT 플랫폼이 가장 사랑하는 지표인 시청 시간과 유료 구독 유지율에 기여하는, 스트리밍 산업의 이상적인 페르소나 그 자체의 행동을 한 것이다. 티빙에서 역주행하는 이전 시즌들이나, 꾸준히 TOP 10에 드는 새 시리즈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뿐인가. 이 프로그램은 플랫폼에 신규 이용자를 유입시켰고, 이들은 자연스레 이전 시즌들을 소비하며 총 시청 시간과 플랫폼 충성도를 높였다. 높은 화제성은 티빙 브랜드 자체의 마케팅 효과로 작용하여, 티빙을 ‘프리미엄 콘텐츠 본거지’로 포지셔닝하는 데 기여했다. 이처럼 프로그램의 가치는 자체 성과를 넘어 플랫폼 생태계와 브랜드 인지도를 강화하는 데까지 확장된다. 그리고 영상 컨텐츠 시장은, 이런 가치가 인정받는 형태로 바뀌었다.
공중파의 잣대로는 ‘제작비만 많이 들고 시청률은 안 나오는 매니악한 프로그램’이었을지 몰라도, OTT의 잣대로는 ‘플랫폼을 구독하게 만들고, 과거 IP까지 소비하게 만드는 강력한 킬러 콘텐츠’가 된 것이다. 제작진이 인터뷰에서 그토록 다음 시즌을 장담하지 못했던 ‘낮은 시청률’이라는 족쇄는, 이제 성공을 가늠하는 데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지표일 뿐이다. 물론 10년 전 첫 시즌부터 지금까지 아무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롤 카드 배정 방식, 에피소드 길이, 무대 장치, 캐스팅 등이 계속 변했고, 사람들의 취향도 달라졌을 수 있다. 하지만 콘텐츠의 본질이 변하거나 천지가 개벽한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변화는 콘텐츠가 놓인 ‘무대’와, 그곳에서의 ‘고객 행동’, 그리고 가치를 측정하는 ‘지표’가 달라진 것이다.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판단도 달라진다. 실패작이 성공작으로 뒤바뀌는 것처럼. 이는 세상 많은 것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어딘가에서는 별것 아니던 것이 새로운 곳, 새로운 기준으로 완전히 다른 가치를 인정받는 ‘슈가맨’ 스토리는 생각보다 흔하다. 반대로 괜찮은 것인데 평가 지표 때문에 평가절하 당하고 있거나, 소리없이 사라지는 것 역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온라인 쇼핑이 활성화되면서 얼마나 많은 제품이 사라지거나 부흥했는가. 음식 배달이 활성화되면서 식당 업계는 얼마나 재편되었는가. 패키지 시장에서 눈칫밥 먹던 소프트웨어가 구독 모델이 되면서 회사의 주력 상품으로 등극하기도 한다. 잠재력이 충분한 사람이 계속 성과를 내지 못하다가, 잘 맞는 곳에서 즐겁게 성과를 내는 것을 보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내가 좋아하던 것이 주목받게 되면 반갑기 그지없다. 어쨌든 그 대상은 자신에게 맞는 시기와 자리를 찾아 생명 연장의 가능성을 높인 것이니까.
갈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좋은 것들이 세상에는 여전히 잔뜩 있다. 그리고 사실 상당수는 방황하다 사라지고는 한다. 모든 것이 이런 아름다운 사례가 되지는 못하고, 이를 볼 때면 항상 안타까웠다. 이런 것들이 언젠가는 좋은 자리에서 자리를 잘 찾고, 생명 연장의 꿈을 이루기를 바란다. 좋은 사람들이 다들 자신의 자리를 잘 찾아 그 장점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란다. 많은 것들이, 많은 사람들이, 분명 세상에서 특정 지표로 ‘인정받는’ 것보다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주기를 바란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나의 가치가 내가 있던 곳에 따라 얼마나 달랐는지를 몸소 체험하지 않았는가. 어쩌면 나도 어딘가에서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많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그저 평범한 사람, 제품, 콘텐츠일지 몰라도, 어딘가에선 당신도-.
그 어딘가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해도 조금만 더 힘내서 사라지지 말고 그 자리에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어딘가를 만났다면 거기에서 충분히 오래, 즐겁게 자신을 드러내주길 바란다. 나 역시도 이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마침 적절한 자리를 찾은 듯한 ‘크라임씬’은 얼른 다음 시즌 제작에 들어가기를 바란다. 그 김에 에피소드 5개는 너무 짧으니 더 많이 가져오면 좋겠다. 티빙도 새로운 재밌는 것을 얼른 가져왔으면 좋겠다. 열심히 아껴놓은 ‘크라임씬’ 에피소드가 이제 하나밖에 안 남아서, 더 없으면 나는 다시 탈주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