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장르 소설의 계절이고, 그 와중에 올 여름은 무라카미 하루키, 스티븐 킹, 온다 리쿠 등 국내에서 날고 긴다는 외국 작가들의 책도 잔뜩 나왔다. 덕분에 볼 책들이 산더미(언제는 안 많았던 것 마냥). 좋은 책은 더더욱 한 가득이었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의 독서 의욕 역시 지나가고, 글자는 눈에 안 들어오는 시기가 도래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데 어째서인가. 그래서 9월에는 책을 적게 읽어서 조금 아쉽다.
역시나 좋았던 책은 볼드체로 표시했다.
2017-07
[이토록 달콤한 고통] : 하이스미스느님은 매우 진부한 이야기도 끝까지 손을 못 떼게 하는 능력이 출중하시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로, 학력도 직업도 멀쩡한 화학자가 이미 결혼한 여자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집착하다 일어나는 진부하고 슬픈 이야기. 이 주인공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재능 출중한 리플리씨’라는 건 읽는 누구나 공감할 듯 하고, 하이스미스 느님의 비뚤어진 심리 묘사나 ‘상상의 연인’을 그려내는 솜씨는 언제 봐도 최고다.
[새빨간 거짓말, 통계] : 스켑틱 추천 도서라 읽었다. 통계 기사를 볼 때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는 지를 핵심만 간결하면서도 쉽게 쏙쏙 뽑아냈다. 나에게는 좀 쉽고 넘나 기본적인 내용이라 아쉬웠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일단 권해 줄 법한 책.
[엔드 오브 왓치] : ‘임무 종료’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적절한 호지스 3부작의 결말. 탐정 추리물로 시작한 시리즈의 성격에는 좀 아쉽지만 여전히 흡입력 강한, 킹님다운 좋은 이야기였다. 자살에 대해 생각한다. 생각이 드는 건 본인 탓이 아니다. 병원이나 자살 예방 전화 센터 등을 진지하게 접한다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말로, 상황은 좋아질 수 있다. 버티며 살아나가다 보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친구는 바다 냄새야] : 쓸쓸해질 정도로 고독한, 별이 가득한 밤이면 아무리 고독을 좋아해도 누군가와 차를 마시고 싶어하는 돌고래와 누군가와 콜라를 마시고 싶은 고래의 귀엽고 따뜻하면서 새파란 우정. 동화책을 좋아한다면 아이 어른 상관없이 친구에게 선물해도 좋을 예쁜 동화책.
[나의 사촌 레이첼] : 사람이, 특히 순진한 어린 사람이 갑작스레 맹목적인 사랑에 빠졌을 때 일으키는 수많은 사고와 오류, 이상 행동들에 대해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이 대프니 듀 모리에 특유의 달콤하고 끈적한 적갈색 타르같은 이야기로 풀어지면 어떨까. 나는 하이스미스느님의 문장 하나를 옮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사랑 역시 이상한 것이었다.’
[비트코인, 블록체인과 금융의 혁신] : 비트코인, 블록체인…요즘 뉴스에서도 나오는데 뭔 말인지를 넘나 피상적으로만 알아서 부끄러워서 읽었다. 여전히 이게 어쩌다 ‘화폐’로 쓰이는 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개념은 얼추 잡은 것 같다. 예시도 많고 설명도 잘 되어 있어서 쉽게 읽었다.
[과학자의 관찰 노트] :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노트를 잘 쓰지 않고, 무언가를 현장 과학자(?)들처럼 꼼꼼하게 기록해야 할 일도 거의 없다. 하지만 관찰,기록-데이터 라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책이었다.다양한 일화와 다양한 노트 사례는 서비스 서비스.
[더블 스타] : 하인라인이 이 작품으로 첫 휴고상을 탔다고. 전형적인 왕자와 거지 클리셰에 우주 배경과 정치 사회를 끼얹은, 가벼운 소품 느낌이라 가볍게 볼 수 있다. 게다가 하인라인옹의 글 솜씨는 언제나 훌륭하니까요.
[모든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알아야 할 사람에 대한 100가지 사실] : 아는 내용도 있고 모르는 내용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사람이 무언가를 받아들이고,표현하는 것에 대한 연구들을 쉽고 흥미롭게 정리해서 풀어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먼 옛날 HCI쪽에 관심이 정말 많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기획자나 디자이너가 아니라도 누구에게나 도움될 면이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일상기술 연구소] : 자신만의 좋은 일상을 향유해가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팟캐스트로 만들고, 이 내용을 책으로 담았다. 다양한 형태로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좋았고, 다들 각자의 뚜렷한 주관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삶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알고리즘 행성 여행자들을 위한 안내서] : 별 기대 안 하고 읽었는데 의외로 재밌다. 넓은 범위에서의 알고리즘에 대한 설명과 실제 어디서 어떻게 사용되는 지에 대한 이야기를 쉽고도 왜곡을 최소화해서 설명했다.
[미스터 하이든] : 꽤 근사한 문장들과 근사한 사건 전개를 가진 미스테리. 하지만 뒤로 가면서 수습하지 못하는 게 넘나 보여서 안타까웠다.
2017-08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 ‘맨스플레인’같은 센세이셔널한 건 없어도,작가의 전작보다 더 신났던 에세이집. 고요가 아닌 강요된 ‘침묵’에 대한 묵직함으로 시작해서 벌처럼 쏘면서 끝난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읽히고 싶구나.
[꿀벌과 천둥] : 온다 리쿠가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로 불리는 건 알지만 이번 책은 굉장하다. 닿고 싶어도 닿을 수 없는 ‘천재’의 영역에 대해 따스한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클래식 피아노에 그나마 좀 익숙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부드럽고 따뜻하고 좋고 근사해서 몇 번이고 지하철에서 내릴 곳을 놓쳐가며(…) 읽었다. 천재란, 그들의 세계란 어떤 걸까. 신에게 사랑받는, 반짝이는, 선물같은 재능. 나와는 영원히 거리가 없을 것 같은, 오래 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했고 이제는 그런 마음마저 무뎌진 그런 것. 오늘 아침에도 사람들과 ‘늦게 발견할 재능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며 깔깔거렸지.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 : 넘나 작가들 특성 잘 드러난 중편 모음이라 웃음이 났다.장강명님은 역시 잘 읽히고 배명훈님은 역시 설정킹이며 김보영님은 정적이라 넘나 내 취향이고 듀나님은 역시 왜 아무도 홍보 안 해주나 싶은 것이다.
[에이다, 당신이군요. 최초의 프로그래머] : 아니 내가 여기다 무슨 평을 더 해 ㅠㅠㅠㅠㅠㅠㅠㅠ 아 번역판 주석을 읽기에 좋아서 볼 만 했다. 에필로그나 마지막화는 너무 좋다 다시 봐도 짱 좋다최고다 ㅠㅠㅠㅠ. 이에 대한 원서 서평은 여기를 보자.
[신큐 치에의 즐거운 혼술] : 어차피 일본 이야기일거고 울 나라와는 환경이 다르잖아! 라고 외치며 안 읽다가 이제 읽은 것을 반성한다.ㅜㅜ 물론 가게 고르기 같은 건 거의 쓸 수 없겠지만 보기만 해도 흐뭇하고 부럽고 사케나 집에서 혼술 하는 소소한 팁 같은 건 괜찮은 내용도 있고 무엇보다 이 작가의 술 이야기는 그냥 보고만 있어도 넘나 즐거운 것.
[내 이름은 빨강(1-2)] : 작가의 다른 작품([검은 책])을 개인적으로 너무 끝내주게 읽은 탓인가.사람들의 극찬에 가졌던 기대에 비해서는 조금 아쉬웠지만 그거야 기대치가 넘 높은 탓이고. 꼼꼼하게 수놓인 붉은 빛의 태피스트리마냥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이노베이터] : 해석기관에서 검색까지, 컴퓨터의 역사를 쭉 훑은 이야기. 이야기가 심심하고 각 인물들이 짧게 다뤄지는 게 좀 아쉬우며 막판의 뜬근없는 인문학 타령은 뭔가 싶고 무엇보다 번역이 영 거슬리지만, 러브레이스에서 시작해서 러브레이스로 끝나는 구성이 좋고, 역사는 심심한 대신 깔끔하고 정리 자체도 괜찮아서 한 번 볼 만 했다. 갖고 있으면서 필요한 부분 찾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 (물론 아주 짬짬이 읽어서 1년 반 걸려서 읽는 통에 중간 내용이 기억이 가물가물한 건 비밀)
[판타스틱 미로여행] : 거대한 미로책이다. 30개의 미로가 실려있고, 지루하지 않게 다리형, 다층형, 워프형 등의 변형 미로도 있다. 입구와 출구가 확실하고 모든 케이스를 확인해 볼 수 있는 미로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가끔 커다란 책을 바닥에 펼쳐놓고 엎드려서 미로를 푸는 것도 나름 여름밤의 어떤 즐거움 중 하나였다.
[n분의 1의 함정] : 게임이론의 기본적인 주제부터 실생활의 확률 통계 문제까지 쉬운 주제들을 두루 다루었다. 이 쪽 주제를 접근하기 위해서는 나쁘지 않은 책.
[사이먼의 고양이] : 사이먼의 고양이 시리즈를 귀엽게 봐서 샀는데…책은 작은 고양이가 사이먼네 새로 입양되면서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다.하지만 난 작고 귀여운 애들이 순진한척 하다가 뒤에서 원래 있던 애들 괴롭히는 서사를 정말 싫어해서, 아무리 입양 고양이가 귀엽고 끝이 좋으면 다 좋다지만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원피스 간단 일러스트 가이드] : 원피스의 캐릭터와 간단한 일러스트를 따라 그리는 책인데, 정말 쉽게 되어 있어서 정말 따라그리기 좋다! 몇 개 따라 그려봤는데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도 감동적으로 귀엽게 잘 그려짐. 손그림 좋아하시는 분이면 활용하기도 좋을 듯.
[상디의 해적 레시피] : 원피스 테마 요리책인데, 나의 원피스가(?) 이렇게 고퀄일 리 없어.
[기사단장 죽이기(1-2)] : 환상을 오가면서도 잘 짜여진 이야기가 후기보다는 전기 소설들의 느낌을 주어서 더욱 마음에 들었던 하루키의 신작.이 세계은 무수한 이야기와 무수한 연관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너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면 그 사이는 연관관계로 맺어질 거야. 특히 최근 정 안 가던 이야기들과 달리 풍부하면서 잘 짜여지고, 마무리도 잘 정돈되어 있어서 더욱 좋았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 : 장 자끄 쌍뻬의 귀여운 일러스트와 따뜻한 이야기. ’cause we were never been boring, we were never being bored. 가 현재까지 이어져 온다는 건 얼마나 환상적인가.
[느빌 백작의 범죄] : 반짝이는 문장들, 극단적인 인간들, 그 중에서 항상 노통브 글 최고의 미친 정도를 자랑하는 사춘기 소녀, 막장으로 치닫는 이야기. 외국 불량식품 먹는 기분인게 아멜리 노통브 소설답다. 그 아찔한 새콤달콤함.
괴물같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야.
2017-09
[Magritte] : 당연히(?) 해설은 다 읽지는 않았고…(어차피 그림 보려고 산 책인걸!(뻔뻔)) 우아하게 정신나간 마그리뜨 그림들은 언제나 훌륭한데 내가 유럽과 미국 미술관을 거치며 마그리뜨 그림 꽤 봤다고 자신할 수 있었는데 이 분 넘나 private collection 많은 것…네네 생전에 그림 많이 팔아 잘 살면 좋은 거지요(울음).
[라곰] : 피카,휘게에 이어 라곰까지. 우리는 북유럽의 역사도 제대로 모르면서 단순하고 깔끔하고 느린, 겉으로 보기에 예쁜 라이프스타일만 무턱대고 부러워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상대적 중용(?)에 대한 문화용어(?)를 알게 된 것은 흥미로웠다.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 : 반 정도는 기존에 읽었던 거지만 다시 봐도 흥미롭고,새로 읽은 이야기들도 역시 재밌었다. 비틀린 어두운 상상력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할란 엘리슨, 이 작가 진짜 뭔가 싶고.
[넨도의 문제 해결 연구소] : 전부터 읽고 싶던 차에 결국 눈에 들어와서 덥썩. 현실의 문제를 최대한 단순하고 깔끔하면서도 예쁘게 해결하는 것은 역시 아주 조금만 룰에서 벗어나서 바로 살행하고 잘 전달하는 것이리라. 내용도 흥미롭고 간결하고 좋았다.
[죽이는 화학] : 애거서 크리스티는 살해 방법에 독극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 독극물에 대해 소설, 실제 활용 내용, 상세 설명을 정리한 책이 있으니 이 어찌 훌륭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내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오직 두 사람] : 단편소설이란 그렇다. 삶을 영위하던 사람들이 있고, 짧지만 강렬한, 혹은 암암리에 누적되어오던 무언가가 터지고, 그 후에도 다시 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삶을 견뎌내는 모습. 그리고 이런 모습에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지는 이야기였고, 특히 표제작은 단순한 듯 강렬했다.
[힘 빼기의 기술] : 힘을 빼고 살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자신에게 닥칠 즐거움도,어려움도, 모두 초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 자세를 익히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사는 게 조금은 쉬워진다. 나는 이제서야 그 것을 10%쯤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것을 50%이상 아는 것 같은 작가가 조금 부러웠다.
[제프티는 다섯 살] : 정신 나간 천재의 정신 나간 단편들.하지만 이 책의 단편들은 수위가 가장 낮아서(?) 부드럽고 따뜻한 이야기도 많았다. 그다지 정상적인 감성은 아니지만 굉장하다는 건 부인할 수 없으며 시간의 비가역성을 보여주는 단편 두 개는 그 간극의 안타까움과 따뜻함이 너무나 좋았던 것.
[전쟁에서 살아남기] : 항상 흥미로운 분야의 숨어있는 과학 이야기를 풀어내던 메리 로취가 이번에는 전쟁에서의 과학 이야기에 도전했다. 전쟁과학 분야는 최첨단 과학기술분야로 익히 알려져 있지만 그 것이 비단 거대하고 파괴력 있는 분야에만 쓰이는 것이 아닌, 군인용 음식이나 사소한(?) 군인재활 분야에까지 어떻게 쓰이는 지를 여전히 흥미롭게 풀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