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호주에서 R 컨퍼런스인 UseR!에 참석했다. (언젠가 아마도 UseR!에 대해 따로 후기를 쓰겠지만) 이 컨퍼런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 중의 하나는 커뮤니티에 대한 강조였다. R은 오픈 소스기는 하지만 Apache Software Foundation 등의 어떤 운영 주체가 따로 있지는 않다(물론 지금은 가장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RStudio 라는 회사지만 R에 대한 개발 및 프로젝트를 주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인지 R에는 어떤 주요 커뮤니티 역시 없다. 그러다보니 깃헙이든, SO든, 레딧이든, 어디든 R 사용자 간에 의견을 교류하고 발전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이 R 커뮤니티 활동이 된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R 커뮤니티 활동에서 R 사용자라는 정체성(?)을 위해 사용자가 공통적으로 갖추어야 할 가치를 이야기한다. 여러 가치가 있지만, 그 중 가장 강조되는 것은 다양성이다.
R 사용자는 R이라는 언어, 혹은 도구의 사용자기 이전에, 각자의 데이터를 다루는 사람이고, 그 데이터의 배경 및 맥락이 다 다르다. 우리는 모두 다른 데이터를 다룬다. 그러므로 서로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고, 그러면서 데이터 분석과, R의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각자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우선시 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배경에서, 자신이 아는 방식대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언어도, 방법도, 결론도, 아무 것도 제대로 나올 수 없는 것이 데이터 분석이다. 그래서 흩어져 있는 R 사용자들에게도 어떤 커뮤니티 활동에서 사용자들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여러 곳에서, 복잡한 생물 문제부터 인권 문제까지 다양한 데이터 분석을, 공통점이라고는 R을 사용하는 것밖에 없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토론하고 해결하고 있다.
실제로 UseR에서는 이런 모습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국적, 인종, 성별, 성적 취향에 상관없이 굉장히 다양했고, 주제 역시도 끝없이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다양한 접근을 하고 있었다. 컨퍼런스 자체도 덕분에 매우 고, R에 대한 애정도 다소 높아지는 재미난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최근의 PyCon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근 2년간은 참석하지 못해서 아쉬워했지만 계속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고, 이번에도 건강상의 이유로 잠깐밖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꽤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
재작년의 PyCon 슬로건은 Respect, Diversity 였고, 이번 슬로건은 Dive into Diversity 였다. 모든 세션 발표에 앞서서 다양성의 존중을 명시한 CoC를 강조했고, 실제로 여성 IT인이라면 너무나도 흔하게 겪어서 겪을 때마다 불편하면서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 너무나도 투명하게 보이는 상황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상황이 발생한 것 자체는 굉장히 유감이지만, 이런 대처 모습 자체가 더욱 인상적이었고, 이 커뮤니티가, 이 업계가, 어쩌면 이 세상이 조금은 한 발짝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세는 어느 커뮤니티에서나 중요한 것이겠지만, 아마도 최근의 Python 커뮤니티에서는 더욱 더 필요한 일일 것이다. 어차피 Python이 요즘에 각광받기 시작한 배경에는 분명 데이터 분석 부분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 알지 않던가. 기존의 개발자 중심의 커뮤니티에서 다른 업종의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 자체도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그 사람들마저도 굉장히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런 과도기에서, 이 사람들을 얼마나 잘 포용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을까. 이 여러가지 모습을, 지금까지의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보아왔고, 앞으로 더욱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PyCon의 모습 하나로 이런 것을 판단하는 것은 섣부른 것이겠지만, 지금까지의 모습으로는 아마도 Python 은 어떤 훌륭한 형태가 되어, 프로그래밍 언어 개발 커뮤니티 이상의 멋진 형태의 사례로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다양성의 존중은 사회 전반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특히 다양한 배경의 다양한 데이터를 다루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필요한 자세일 것이고, 이런 자세는 지금도 매우 중요하고, 앞으로도 점차적으로 중요해질 것이다. 특정 가치관에 고착화된 사람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이는 명확한 사실이고 사회의 변화이며, 아마도 이런 것이 일종의 ‘발전’이 아닐까. 더욱이 애초에 어떤 고착화된 사고는, 고인물 형태로는 바로 도태될 수밖에 없는, 다소 극단적일 정도의 유연성을 필요로 하는 데이터 분석가에게는 어차피 쓸데없는 방식이기도 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