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딥러닝과 바둑-번역 후기
Post
Cancel

딥러닝과 바둑-번역 후기

이번에 번역되어 나온 [딥러닝과 바둑]에는 역자 후기가 없다. 조판 후 PDF에 역자 후기용 페이지가 있길래 ‘저, 역자 후기 안 쓰면 안될까요?’라고 요청했다. ‘왜 역자 후기를 쓰지 않으려구요?’ 라는 편집자 분의 말에, ‘지금까지 모든 책에 역자 후기를 썼거든요. 역자 후기 없는 책도 한 번 내 보고 싶었어요! 어차피 사람들이 역자 후기 보고 책을 사는 것도 아니라서,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괜히 종이 낭비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라고 답해드렸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종이 낭비는 내가 사대는 책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지만 어쨌든 긴 작업이었고, 책을 번역하면서 소소한 마음도 남지 않았을 리 없다. 그래서 종이 낭비를 하지 않는 선에서 간단히 개인적으로만 정리해 보려고 한다.


바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착점이다.

혹자는 승부를 가리는 계가가 우선 아니냐지만, 바둑의 승부는 우연히 나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 이어지는 논리적 귀결일 따름이라.

굳이 계산을 편하게 하기 위해 이리저리 돌을 움직여 만든 사각형에는 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착점도 그저 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바닥에 떨어진 돌을 주워 옮기듯 해서야 그 멋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서 미끈거리는 돌을 탁 하고 내려놓는 순간 반상은 우주가 되고 세상을 버티는 검은 줄을 타고 새로운 진동이 흐른다.

정소연, [우주류]

2016년, 이라고 하면 벌써 조금은 아득한 때가 되어버렸다.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마지막 승리를 얻어내던, 그리고 5전 1승 4패로 패했던 기억도 이제는 새롭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복잡한 보드게임으로 알려져 있는 바둑에서, 세기의 천재로 불리는 이세돌이, 바둑돌 하나 못 움직여서 대리인을 두어야 하는 프로그램에게 세 판을 내리 내주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봤을 때 나와 전 세계의 인류가 느꼈을 복잡다단한 두려움, 안타까움과 충격, 4번째 에서 알파고가 화면에 에러 메시지 팝업을 나타냈을 때 느꼈던, 마치 판도라의 상자 바닥에서 아직 나오지 않은 희망을 본 것 같은 기분이 여전히 생생한데, 이제 그런 기억도 벌써 반 십년 전의 것이다. 그 이후 알파고도 그 다음 버전인 알파고 제로에게 패했고, 다른 여러 유명한 바둑 기사도 알파고 및 인공지능 바둑봇에게 도전한 후 패했다. 더 이상 인간 대 인공지능의 바둑은 의미가 없어졌고, 인간 기사 간의 바둑에서도 바둑봇을 컨닝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며, 이세돌은 바둑계를 떠났다.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은 바둑에 일종의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2인용 보드게임류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동아시아권에서 어린 시절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바둑에 로망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바둑에는 ‘궁극의 보드게임’, ‘우주의 삼라만상을 담고 있는 게임’, ‘인생만사처럼 복잡다단한 게임’ 등의 환상의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고,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등의 유명한 바둑 기사들에는 천재라는 수식어와 전설적인 일화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래서 바둑은 늘 동경의 대상이지만, 친숙하게 다가오기에는 다소 부담스럽기도 한, 웬지 인간계가 아닌 신선계에서나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무언가였다.

궁금한 마음에 알파고의 구조가 설명된 논문이나 기사 등의 자료를 살펴보았다. 딥러닝에 대해서 얄팍한 지식은 가지고 있으므로, 대충 구조를 설명하면 어떤 구조인지 이해가 갔다. 그리고 엄청난 컴퓨팅 파워로, 16만개의 기존 기보 및 자체 대국 등을 통해 생성한 3천만개의 기보를 학습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정말로 잘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이길 것이다’, ‘바둑은 단순한 점수놀이 경기 이상이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알파고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그냥 최적화된 알고리즘이 아무리 끝내주게 판을 짠다고 하더라도 바둑 고수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둑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는 바둑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비논리적인 환상을 가졌다. 잘 모르는 사람이 로망을 가지고 본 바둑의 수는 그냥 경기에서 더 많은 말을 따내고 점수를 더 많이 얻기 위해서 두는 말이 아니었다.

지난 책 이후에 번역은 더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반쯤 농담으로 ‘번역을 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한 후에 책 제안을 받았을 때도 반신반의하면서 제안받은 책 목록을 보았다. 그리고 이 책이 눈에 띄었을 때, ‘한 번만 더 해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것은 역시 그냥 딥러닝이 아니라, 딥러닝과 바둑에 대한 이야기였고, 바둑이 딥러닝의 어떤 알고리즘으로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는 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참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선택을 하게 되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첫 장부터 나오는 바둑 용어들-심지어 eye, ladder 같은 일반 단어를 바둑 용어와 헷갈리지 않으면서 풀어내야 했다-을 보니 그냥 호기심으로 막 했다가는 아마도 또 후회를 할 것 같았다. 바둑 영어 사전을 사고, 집에 있던 바둑책을 꺼내서 다시 보기 시작했고, 바둑 게임을 깔고, 바둑 서버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뒤적거려보기도 했다. 여전히 이해하기에는 멀지만, 신묘한 세계라는 생각을 했다.

그 신묘한 세계가, 프로그래밍 언어와, 숫자와, 알고리즘과 만나는 과정은 매우 평이하면서도 새로운 경험이었고, 그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딥러닝에 들어가는 수많은 이론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작고도 큰 세계를 모사해 가는 모습은 익숙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신기했다. 사람들은 알고리즘에 묻혀버렸다고 아쉬워했지만, 이를 이루는 근간은 현대 수학과 전산학의 주요한 새로운 기술들을 정교하게 엮어놓은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이는 현대 인공지능의 총아인 딥러닝에 대해 익히는 교재로도 매우 빼어나며, 바둑이란 세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접하기에도 무리가 없다.

작년에는 개인적으로 큰 일들이 많았고, 예상치 못한 상황들과 건강 문제 등으로 번역 완료가 조금 미뤄졌다. 이는 앞으로 번역을 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책이 나오기 전에 이세돌이 은퇴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복잡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것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세돌은 이전에도 천재로 불리는 다른 바둑 기사들과는 좀 더 다른 독특함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더욱 더 비현실적인 이미지가 있다. 그런 이미지는 이세돌과 AI의 대국이라는 이벤트에 경외감을 더욱 불러일으켰고, 이세돌은 인간의 대표라는 상징이 주어지기도 했지만 역시 바둑은 인간의 것이 아닌 신선계의 것이며, 논리적으로 풀 수 없는 미지의 문제라는 이미지에 부합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이세돌이 AI에 패했고, 이를 인정했고, ‘한 판 잘 놀고’ 바둑계를 떠남으로서 신선계의 상징같던 바둑마저 AI에 지배당했다는(?) 사람들의 비탄이 이어지기도 했지만, 나는 어떻게 보면 바둑이 이제 인간계에 가까운 쪽으로 그 세계를 확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이렇게 바둑에도 새로운 우주가 열린 것이리라. 반상의 우주는 컴퓨터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확장되었고, 그 접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 우주의 방향은 사람들에게 더 먼 방향이 아닌, 더 가까운 방향을 향했다. 맥스 테그마크가 말한 [라이프 3.0]은, 바둑에서는 아마도 현실이 되었다. 우리는 이 새 우주와 공존하게 되었고, 이를 받아들이기는 다른 세계보다는 편할 것이다. 바둑은 많은 사람들의 우주에서는 신선계에 있었을 지 몰라도, AI는 누구에게나 모르는 새 바로 옆에 다가오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오히려 더 사람들에게 가깝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고, 오히려 이제는 반쯤은 ‘이해해야 할 대상’으로, 혹은 ‘바둑도 다 세상 이치로 돌아가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좀 더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AI 구현에 많이들 이야기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파이썬과 케라스를 사용하고, 심지어 비슷한 오픈소스 바둑봇이 나와있어서 이를 예제로 사용한다. 정말로 바둑이 더 이상 멀지 않고 친숙한 것이고, 어쩌면 세상 만사가 바둑 안에 녹아있던 것처럼 바둑이 세상 만사에 녹아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이 책을 읽기 최적의 때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바둑의 확장된 세계를 의도와 상관없이 접하게 되었고, 그 우주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안내서가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나온 이 책은, 안내서 역할에 분명 적합한 책일 것이리라. 이 책에 힘을 보탤 기회를 주고 멋지게 만들어주신 편집자 및 관련자 분들께 감사하고, 개인적으로도 잘 마무리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저자의 말과 마찬가지로, 이 책과 함께 즐거운 여행이 되시길.


판매 링크는.. (…)

  • 한빛미디어 https://bit.ly/2TiJ2Q6
  • 교보문고 https://bit.ly/36cMml1
  • 예스24 https://bit.ly/3e2Lq5f
  • 인터파크 https://bit.ly/36cavIc
  • 알라딘 https://bit.ly/3dVXi94

그리고 어느덧, 작은 책장 한 칸이 나와 관련된 책으로 가득 찼다. (원서가 거의 반이지만 넘어가도록 하자.) 정말로 이 정도면, 이제는 옮김 작업은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어쨌든 즐거운 시간이었다.

    This post is licensed under CC BY 4.0 by the author.

    질의(Query)에 관하여

    202004~202006 책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