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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을 보내며

참고 추천 BGM

12월 초에 라스베가스에 다녀왔다. 매우 빡빡한 일정에 시차적응 할 새도 없이 일정이 끝나고 짐을 쌌다. 가기 전에 10분가량 시간이 남아서 잠시 침대에 털썩 앉아 창의 커튼을 걷었다. 큰 창 사이로 사진의 야경이-실제로는 훨씬 더 화려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참으로 뜬금없이 머릿속에 한 줄의 문장이 스쳐 지나갔다.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

도대체 갑자기 이런 사고가 왜 나왔는 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생각이 정말로 정신을 확 들게 할 정도로 강렬히 들었다는 것이고, 이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했다. 그렇게 조잘거리게 된 이유도 사실 알 수 없다. 그냥, 너무 충격적이었을까. 평소에 전혀 생각을 하지 않던 일도 아닌데.

아마도 내년이면 사회적 나이로 앞자리가 또 달라지게 되어서일까. (두 가지 나이로 살지만 그냥 많은 쪽(사회적 나이)이 편해서 보통 그렇게 지낸다. 굳이 낮춰서 어따 쓰나..) 최근 건강 문제로 좀 더 고민이 많아져서일까. 하지만 10년 전에 앞자리가 달라지는 것도 정말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번이라고 뭐가 다를까. 골골대는 건 하루이틀도 아니었는데 이번이라고 뭐가 다를까.

이제는, 아마도, 조금 더 자신이 없어져서가 아닐까. 질 자신이요. 계속 이렇게 날뛰면서 살아갈 자신이. 이제는 나이가 들 수록 이직하기 힘들다는 것도 알고, 사회의 요구치도 달라지는 것도 안다. 물론 갑자기 계단처럼 급하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나는 이미 예전에 졸업했어야 하는 것들에서 굳이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은 부끄럽다.

그리고 그 와중에 최근에 발표를 했다. 무슨 생각으로 하기로 했는 지도 모르겠다. 연봉 협상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이를 위해 내 이력을 숫자로 정리했다. 그리고 그걸 보는 순간 다시금 마음이 내려앉았다. 대체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아온 것인가. 왜 이렇게 숫자들은 크기만 하고 사람들은 이 숫자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문득 내가 폭삭 늙어버린 것 같았다. 이대로 괜찮은가. 조금, 그 숫자들이, 내 이력이, 징글징글했다. 나는 아직 버텨나가야 할 날이 한참인데, 이 아웃라이어같은 숫자들을 가만히 곱씹고 있노라면 대체 나란 데이터의 점은 세상이란 플롯 안에 어디에 찍힐 수 있을 지 그저 까마득하기만 한 것이다. 나의 자리가 있기는 할까. 사람들이 보는 좌표 안에 나의 자리는 없다. 시각화를 위해서 이미 버려지고도 남았을 것 같은 나란 점. 그렇게 지워지는 나란 존재.

올해는 너무 피로가 쌓인 해였다. 이제는 정말 피곤했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뭐 올해는 밤새고 일한 적도 없지 않냐 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그리고 더 아쉬운 것은 그렇게 피곤한 것에 비해 남은 것이 별로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마음의 삽질. 그 피로가 극대화된 것이 지난 달이었고 사실 아직 그다지 회복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용쓰고 있지만. 정말 새해에는 새 마음이 되었으면 좋겠다. 작년 초, 재작년 초 정도면 괜찮았던 것 같은데(정말?).

상반기 후기에서도 대충 썼지만, 올해는 나의 생산성도 정말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반기에도 그 아쉬움은 계속 되었다. 물론 상반기와 하반기는 다르다-하반기에는 회사에 들어갔고, 많은 것이 달라졌다. 회사 생활을 그렇게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생각을 했고, 분명 시작할 때와 반 년 후인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분명 적응기도 있고 기반도 다졌고 더 다질 거니 분명 새해에는 더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고, 새롭게 배운 것도 많으며, 업무적으로 한 것에 대해서는 당당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체 나는 왜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까. 그래서 남는 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분명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더 의욕적일 수 있었을텐데, 어쩌면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기대했을 지도 모르는데(물론 그 기대는 내가 하라고 한 적 없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나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다) 아쉬운 마음이 크다. 게다가 추석 이후 즈음부터는 체력과 정신력이 바닥을 쳐서 억지로 버티고 있는 것을 주변에 너무 많이 보여서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하지만 그나마도 회사 업무일 뿐이고, 회사 외적인 것으로는 더욱 엉망진창이었다. 이사 준비 즈음부터는 슬슬 맛이 가고(…) 이사 직후부터는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거의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회사 업무 외에 벌려둔 일은 모두 홀딩 상태가 되고, 이삿짐도 정리를 못 하고 거실에 몇 주 동안 늘어두고 출퇴근만 겨우 하면서 몇 주를 보냈다. 좀 나아질 법 하다가 실망스러운 일이 생기는 통에 다시 악화되기도 했다. 사실 지금도 아마도 후유증일 것 같은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나를 믿고 일을 진행해 주셨던, 주시는 분들께 그저 미안하기만 하다. 개인적으로 하는 취미 활동 등은 말 할 가치도 없다. 데이터 관련 블로그 글을 한 달에 하나라도 쓰자고 생각했는데, 당연히 하지 못했다. 그나마도 겨우 주억거린 것 같다. 책이며 운동에 대해서는 돌아보기도 부끄럽지만 그래도 그나마 기억나는 대로 마주해야겠지. 책은 책 리뷰에서 이미 썼고 요가도 선생님 바뀐 핑계대며 안 가다가 이사 후에는 그대로 뻗어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링피트가 있다!

아마도 그래서 조금 더, 겁이 나고 불안해진 것 같다. 이렇게 이제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되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더 엉망인 것 같은데,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내가 아무 것도 아니게 되면 어떡하지. 이런 것이 나이가 든다는 것일까. 나이가 들어버린 것인가- 하는 불안감.

분명 즐거운 시간도 있었다. 엄청나게 의미있는 아파트 이사 같은 건 묻히지 않겠지만 묻힐 수도 없다. 힘들지만 분명 의미있는 프리랜서 기간도 묻혀서는 안된다. 여행도 소소하게건 거대하게건 그럭저럭 했고, 이렇게 시시하게 흐릿해질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과거는 분명 블러 필터가 먹여지고 밝기가 30정도 올라가서 내 시선에서의 흐릿한 폴라로이드 사진이 되어버리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아마도 올해는 필름이 불량이었던 것 같다. 윤곽도 제대로 보이지 않고 색도 제대로 들지 않은 풍경. 이런 시기도, 과연 그리워할 때가 있을까. 그리워할 형태마저 남아있지 않은 시간들. 그리고 이렇게 나약했던 상태의 나의 모습은, 어쩌면 형체가 없는 것이 더 좋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마저도 아쉬워할 때가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새해가 다가와서 다행이다. 억지로라도 끊고, 웬지 새 마음이, 새로운 상태가 될 것 같다는 희망을 주는 시기가 와서. 그리고 그나마 바닥을 쳐서일까, 이제는 나의 상태가 다시 조금이나마 올라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도 좀 더 잘 되고, 몸도 좀 더 움직이고 싶고, 머리도 조금 더 돌아가는 것 같고. 아직 완전히 아무것도 못 할 정도로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마음이 안 좋으면 바로 몸이 안 좋아진다. 이 것은 나 자신에게서는 이미 여러 번 증명된 명제다. 그러면 이 명제의 대우는 몸이 튼튼해지면 마음도 튼튼해지지 않을까. 나이 걱정따위 훨씬 덜 들지 않을까. 아마도 이 대우는 참일 것 같으니, 새해에는 정말 운동을 할 것이다. 링피트도 열심히 하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니 각기 다른 사람들이 신기하게 입을 모아 추천하는 필라테스 할 만한 곳도 찾아볼 것이다. 병행해서 하면 괜찮아지겠지. 이러다보면 어쩌면 다시 검도를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제는 검도 하는 곳 자체가 거의 없어진 것 같지만.

그리고, 현재 하고 있는 역할이 꽤 재밌다. 이 것은 정말 생각지 못했던 일인데, 아직 길게 하지는 않았지만 팀 리드란 생각보다 재밌는 일인 것이다. 물론 이 것은 주변 사람들이 다 좋은 분들이셔서 가능한 일일 수도 있지만, 내가 항상 외치던 가치인 ‘일이 되게 하는 것’이 이 위치에서 하는 것이 기존 대비 임팩트가 훨씬 큰 것이다. 게다가 역시 혼자 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을 모으고 모아서 계획 세워서 주욱 나가는 것도 재미있고. 생각해보면 역시 내 취향은 RPG보다는 경영시뮬 전략시뮬 쪽인데 왜 이걸 생각을 못 했을까. 기존에는 남들이 만들어놓은 형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갈고 닦아서 그것을 펼쳐놓는 것이 내 덕목이었고, 기술을 열심히 닦으면 그 안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하지만 ‘내가 내 형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자유로워지면 어떨까’. 내가 판을 벌리고, 그 일이 되게 하면 어떨까. 아직까지는 이 역시 꽤나 재밌는 것 같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과, 내가 생각하는 형을 만들어가고 싶고 그 안에서 내가 생각하는 자유를 누리고 싶다. 그리고 그게 남이 보기에는 ‘일이 되는 것’으로 만들고 싶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커가고 싶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고 싶고, 같이 더 큰 일을 더 빠른 속도로 되게 만들고 싶다.(이 문단의 문장은 이자람 인터뷰에서 따왔다.)

글도 더 많이 쓸 것이다. 새해에는 좀 본격적으로 글을 써보려고 한다. 나의 소싯적의 재능 중에 지금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피아노도, 글도 버려둔 지 오래 되었다. 다들 나름 전국구 재능인데(…) 이렇게 썩혀버리기 아깝지 않은가. 2x년이 지났더라도 다시 먼지를 털어보려고 한다. 자세한 계획은 내 노트에만 남겨둔다. (물론 일단 현재 계속 미뤄둔 부업이 먼저입니다 당연히)

어떻게된 되겠지 하고 미루는 습관도 고칠 것이다. 이제는 알 때도 되지 않았나. 어떻게든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내가 잘 했을 때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서 겨우 아둥바둥 따라왔었다는 걸. 언제부터 이렇게 손 놓고 적당히 떨어지지 않을 정도만 하자 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이것도 지침의 소산이라고 믿어보자. 하지만 이제는 그만 해야지.

올해의 나도 다 현재의 나를 만드는 일부고, 어쩌면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의외로 나쁘지 않다. 정말로 바닥을 쳐서, 지금보다는 낫겠지 하는 희망이 있는 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보다는 안 늙었는 지도 모른다. 하지 못한 게 많지만, 뭐 어떻게든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바닥에서도 내가 이만큼 했는데, 지금은 올라가는 중이니까 훨씬 더 많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든 세상은 나아질 거고, 나도 뭔가 나아질 것이다. 지인분 말씀대로, 어제보다 오늘이 좋지는 않았을 수도 있지만, 오늘보다 내일은 분명 더 좋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이번 주의 평균과 다음 주의 평균은 분명 다음 주쪽이 나을 것이다. 이번 달보다 다음 달이 분명 더 나을 것이고.

그런 안정성을 위해 나는 더 강해질 것이다. 지금보다가 아니라, 이전보다 더. 이렇게 불량인 필름을 만들지 않기 위해 더 단단해질 것이다. 외강내유라면서 속은 어쩔 수 없다며 나를 쪼개려는 칼날에 속지 않을 것이다. 충분히 두껍고 단단한 외피는 속과 구분할 수 없다. 그렇다고 속을 텅 비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속도 차곡차곡 채워갈 것이다. 그래서 일이고, 사람이고, 뭐가 흔들린다고 하더라도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할 것이다. 안정적이고 잉여로운 평안함을 꿈꾸지만, 이렇게 흔들리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 그런 일은 아마도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렇게 단단해져서, 나는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이다. 더 올라갈 것이다. 난 아직 하고 싶은 게 많고, 더 크고 더 많은 일들이 되게 하기 위해 내 영향력을 더 떨칠 것이고, 더 많은 세대와 사람을 아우르고 같이 나갈 것이다.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될 것이고, 꽉 찬 사람이 될 것이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울 것이다. 조금씩, 더 큰 그림을 그려나갈 것이고, 그 그림의 밑그림부터 액자에 넣는 것까지, 모두 다 챙길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어차피 벌어질 판이라면, 그 판 내가 직접, 더 제대로, 더 크게 벌릴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챙겨야 할 게 많다. 물론 당연히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은 일을 벌릴 수록 더 많아질 것이고, 안 좋은 소리는 뱅만배 들을 것이고, 어쩌면 사는 것 자체가 두려워질 지도 모르고, 못하는 게 부지기수고 더 많이 흔들릴 일만 남았지만, 그래도 쳐봐야 요즘 같아지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리고 그렇다면, 다시 또 기어 올라가면 그만이다. 점점 그럴 기력도 없어질 지도 모르겠지만, 그 때는 그러면 다른 무언가가 더 남아있을 것이다.

최근 화제가 된 ‘슈가맨’ 양준일 편을 보았고, 최근의 뉴스룸 문화초대석도 찾아보았다. 나도 아주 어설프게 기억하고 있던 가수였고 가수 자체에는 사실 큰 감흥이 없었지만, 등장에서 한 이야기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분명 삶에서 일찌감치 의도하지 않은 많고 깊은 굴곡을 만났고, 과거의 기억이 현재와 미래를 잡아먹는 환영에 오래도록 시달렸지만 악해지거나 흐려지지 않고 선하게, 현재의 자신을 긍정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그렇게 살다 보면, 투명인간이 된 것 같고 도돌이표같던 삶에서 형체가 생겨난다는 것. 그래서 그 웃음이 그렇게도 밝았었나보다.

그리고 나는 요즘, 그가 ‘슈가맨’에서 했던 말을 종종 되뇌이곤 한다.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더 나아가기 위하여.

네 뜻대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거 내가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마.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

    This post is licensed under CC BY 4.0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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