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일본에서 에반게리온 신칸센이 나온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것을 보고 마침 휴가가 남아서 어디든 떠나고 싶었던 나는 ‘어머 이건 타야 해.’ 를 외치면서, 일본어를 하나도 못 함에도 불구하고 기사 및 무수한 웹사이트를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면서 자세한 정체 및 탑승 신청 방법을 알아냈다(정리 내용 링크). 그리고 넘치는 잉여력과 몇 안 되는 본인의 장점 중 하나인 실행력으로 1달간 매일같이 신청을 했고, 결국 칵핏에 탈 수 있는 A상 당첨 메일을 받게 되었다.
이 열차가 신오사카-하카타므로 이 김에 오사카-후쿠오카를 돌고 오자는 어마무지한 계획을 순간적으로 지르고 바로 오사카 인 후쿠오카 아웃 비행기표를 질렀다. 요즘 일본행은 어느 저가항공사에선가는 할인행사를 한다. (덕분에 왕복 비행기티켓이 신칸센 가격과 비슷했다.(물론 이것은 일본 기차비가 어마무지하게 비싼 것도 있다. 오사카-후쿠오카 신칸센이 14480엔이었다.)
신청을 해서 A상이든, B상이든, 당첨 일자/구간/시간 메일을 받는다. (나는 오사카-> 후쿠오카 행의 신오사카-니시사이칸 구간을 해서 신오사카에서 타자마자 들어가는 식이었다.
해당 시간 전까지 가는 구간의 신칸센 표를 끊고 들어간다. 이 기차는 전좌석 자유석이어서 따로 좌석을 예매하거나 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당일자 신칸센 구간 표를 끊으면 된다. 일반 신칸센과 동일하게 운행되므로, 열차 이름과 시간이 전광판 등에도 안내가 된다. 당첨 메일로 기차 이름과 번호가 나오므로 그 기차에 맞추면 된다. 내가 탄 기차는 코타마 741호였는데, 11시 32분 출발인데 11시 40분 기차가 전광판에 뜨도록 이 기차가 안 나와서 처음에는 불안해서 어쩌지 어쩌지..하다가 메일 프린트 된 것을 들고 인포로 가서 가리키면서 이 열차 언제 오냐고 물어봤다. 인포 분은 영어를 못 하시고 나는 일본어를 못 하지만 글자를 보고 ‘5번 개찰구 가셈. 좀 있으면 온다’라고 알려주신 것 같다. 정말 좀 있으니 떠서 안심하고 들어갔다. (하지만 들어갔더니 메일 프린트한 걸 두고 온 것이 함정. 그나마 안내문에 ‘프린트 한 거나 메일 화면을 제시하라’ 라고 했어서 그나마 안심했다. )
한 20분 전에 들어갔는데도 플랫폼에 사람들이 우글우글. 다들 거대한 카메라 및 핸드폰을 들고 플랫폼에서 대기하고 있어서, 계속 직원분들이 선 밖으로 물러나라고 제지하고 해야 했다. 에바 신칸센은 11월부터 운행했고 내가 간 게 12월인데 아직까지. 아 아직 사골게리온 더 울궈먹어도 되겠어. (…일본까지 기어가서 신칸센을 부득불 타고 온 네 녀석이 할 이야기는 아닐텐데?! )
그리고 눈을 반짝이며 포스 넘치게 입장하는 우리의 에바, 아니, 500TYPE EVA 신칸센.
도착 후 청소 및 점검한다고 기차는 대기하고, 직원분이 나와서 안내를 하는데, 기본 승무원 복장 겉에 에바 신칸센 색 앞치마를 입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사진 같이 찍고 난리도 아니었음.
기차를 탄다. 기차의 1량은 칵핏 및 전시실로 되어 있고, 2량에는 전시실에 들어갈 사람들 대기장소 및 뒷좌석은 착석 가능하고, 3, 4량은 2량과 유사하게 좀 에바스럽게 꾸며놓은 편이고, 5, 6량은 일반 차량이다. 난 일단 바로 1량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2량에 탄다.
- 승무원이 안내를 해주는데, 일본어로 머라머라 한다. 못 알아듣는다. (…) 일단 대충 대기석으로 보이는(Waiting seat! ) 자리에 앉는다.
- 아이패드로 메일 내용을 보여줬더니 번호와 이름 체크를 하더니 안내서와 명찰을 준다. A상은 녹색, 전시관 구경만 하는 B상은 흰 색. 안내서는 100% 일어. 여기까지 올 정도면 일어는 당연히 할 줄 알겠지만 아니요 아니라고요. 영어 안내서 필요합니다. 승무원들도 영어를 잘 하지는 못해서 어버버버. 그래도 일단 친절합니다. 거기다 대충 눈치와 손짓 정도로 알아듣는다.
- 대충 정리하고 들어오라고 한다(아니 하는 것 같다). 사람들 따라 들어간다.
대충 이런 식으로, 디오라마에는 신칸센과 에바의 관계가 피규어로 꽤 열심히(하지만 유치찬란하게) 만들어져 있고, 그 옆에는 캐릭터와 내용에 대한 설명이 써 있는 것 같지만 나는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 그냥 레이 등신대 판넬이 있다(…).
- 그리고 A상인 녹색 명찰의 사람은 한 명씩 저기 노란 색의 KEEP OUT이라고 된 곳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 차례가 되었으니 들어가 보도록 한다. 사실 여기가 포인트죠. 여기에는 어마무지한 칵핏이 있다. 안내원의 설명대로 신발을 벗고 칵핏에 탄다. 넓어서 완전 편합니다. 아 이대로 후쿠오카까지 갔으면 좋겠어..
자리에 앉으면 시스템에서 얼굴을 인식한 후 머리 양쪽에 에바 파일럿용 귀를 달아준다. (…) 그리고 앞과 좌측에 화면이 뜨고, 좌측은 창밖이 반투명하게 비치면서 에바 시스템이 나오고, 앞 화면에서는 갑자기 사키엘이 등장한 제 3 동경시가 나오고, 미사토 및 네르프 직원들의 급박해진 상태가 된다. 그리고 나는 에바 파일럿이 되어서 사키엘과 싸우는데…(진짜다) 갑자기 AT필드 표시가 막 되길래 어버버버 하니까 옆에서 안내해주던 승무원이 AT 필드 찢는 흉내를 낸다. 그래서 보니까 내 행동을 인식하는 거더라. 우와. 하면서 승무원분을 따라하니 정말로 AT 필드가 찢긴 게 나왔다. 우왕 신기해! 그러고 있으려니 우리의 유명한 대사 ‘목표를 센터에 넣고 스위치’ (…) 사키엘이 화면 가운데 오면 스위치를 열심히 누르면 되는 것이다. 열심히 목표를 센터에 넣고 스위치. 목표를 센터에 넣고 스위치. 그러다보니 사키엘을 섬멸했다 나님! 우와 신기해- 하고 있다 보니 화면에 ‘Change the pilot’ 이라고 나오더라. 그러면 일어나서 칵핏실을 나오면 된다.
전시관은 더 보려면 더 봐도 되는데 어차피 나야 일어를 읽을 수 없으므로 그냥 일찍 나왔다. 칵핏 탑승을 비롯한 전시관 관람은 30분 조금 넘는 정도(구간마다 다르다). 이 시간 동안 칵핏을 체험할 수 있던 A상은 4명이었다. 실제 1인당 배정 시간은 8분 남짓하게 되는 것 같다. 아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라도 그저 햄볶았다.
그리고는 신칸센을 쭉 돌아보았다.
- 하루 한정 50개인 에바 에키벤을 판다. 1500엔. 원래는 신고베역과 니시사이칸 역에서만 판다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신오사카역 에키벤 가게에서 발견하고는 냉큼 샀다. 이 에키벤의 매력은 도자기로 만들어진 에바 신칸센 모양의 그릇은 들고 올 수 있다. 연어알과 구운 연어가 들어간 에키벤으로, 신지와 겐도의 부자관계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이런 쓸데없는 디테일…) 내가 이거 사니까 뒤에서 ‘초호기 에키벤!’ 하면서 신기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전시관을 관람하고 나오니 12시쯤 되어서 에바 신칸센에 앉아서 에바 도시락을 먹었다. 우와.
코다마호는 기본적으로 다른 신칸센보다 정차하는 역도 많아서 느리다. 그러다보니 굉장히 널럴하다. 옆자리에 누가 앉을까 걱정하지 않고 짐을 잔뜩 올려놔도 되었다. (심지어 주말이었는데.) 하지만 인간적으로 너무 느려서 굳이 후쿠오카 갈 때까지 타고 있을 필요는 없더라. 한 2/3쯤 간 후에는 빠른 열차로 갈아탔다.
하카타 역에는 에바 카페, 에바 특집을 하는 서점, 에바 팝업 스토어(아뮤플라자 지하 2층) 등이 있다. 사도 카레나 LCL음료 등이 있다. 나는 배도 부르고 이런 음식은 쵸큼 무서워서 조용히 에바 쿠키에 커피나 마셨다. 커피는 그냥 그랬고 쿠키도 그냥 그랬다.
나에게는 덕력의 기원인 맹목적 열정과 애정이 부족해서, 서브컬처류에 관심은 많지만 어떤 것에도 덕후는 되지 못하고 그냥 잡다하게 관심만 갖는 저주받은 잡덕에 불과하게 되었지만, 부족한 열정은 돈과 시간으로 때우다보면 덕후는 아니더라도 그런 덕력 넘치는 사람들과 대화가 될 정도까지는 어케어케 갈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이벤트가 그런 대표적인 것 아닌가. 나름 아무때나 하기 힘든, 시간과 (통장을 바닥내며) 끌어모은 돈과 약간의 관심이 합쳐져서 만들어낸 즐거운 이벤트였다.
– 이 이벤트는 2015년 11월부터 2017년 3월까지 한 것으로 알고 있고, 나는 꽤 초기에 다녀왔다. 내가 다녀온 후에는 이것과 엮어서 투어 패키지도 생겼고 내국인 한정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외국인이 이렇게 많이 신청할 줄 몰랐겠지…)
지금은 끝났겠지만, 즐거운 이벤트였다.
(해당 내용은 여기서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