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중요한 일들은 말하기도 제일 어렵다. 그런 일들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말로 표현하면 줄어들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는 무한히 커보였는데 막상 끄집어내면 한낱 실물 크기로 축소되고 만다. – 스티븐 킹, [스탠 바이 미]
올해 내가 들은 잘못된 정보는 다음과 같다.
- 로또가 되었든 코인이 되었든 뭔가 잘 되어서 은퇴했다 -> No.
- 개인사업자를 내고 프리랜서로 완전 전향했다 -> No.
- 은둔 백수로 살고 있다. -> No.
아예 관심이 없는 것보다 좋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같이 안 맞는 이야기들. 그리고 이왕 관심을 가져준다면 직접 물어보면 어떨까. 나는 여기저기에 언제나 커피챗 환영 밥은 더 환영 일거리를 논의한다면 더더욱 환영 이라는 의사를 항상 밝히고 살았는데. 올 상반기에는 가족사로 꽤 다사다난했다. 대비가 되지 않은 일과 그로 인해 도미노처럼 일어나는 일은 사람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든다. 빠져나갈 수 없는 일들, 평소에는 자유로웠던 상태를 갑자기 가장 자유로울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사회적 굴레가 가져다주는 피로. 그냥 모든 것이 다 지긋지긋했다.
그리고 도망쳐 간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또 다른 피곤한 곳에서 보낸 하반기. 어제는 그 하반기를 완성하는 프로젝트를 끝냈고, 아직 약간의 유지보수가 남았지만 어쨌든 끝냈다.
나름 짧은 기간에 많은 것을 했다. 낯설은 분야에서 데이터 서비스를 하나 오픈했고(일반 사용자 대상은 아니어서 대다수가 볼 일은 없을 것이다만), PM을 했고 데이터 설계와 대시보드 설계와 지표 디자인과 예측 모델링을 했고 프롬프트와 약간의 설계로 음성 AI와 연결하는 것까지 완성했으며, 데이터 관련해서는 해당 분야 공공기관과 MOU 협의를 해서 아마 이 곳은 MOU가 곧 될 것이다(물론 이 것들은 당연히 혼자 한 것은 아니고 회사 내외부의 사람들과 같이 진행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내가 주도했다). 어쨌든 새로운 것들이 잔뜩이었던 만큼 많은 것을 익히는 신나는 프로젝트면 좋았겠지만 결과가 어떻게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무기력하게 만드는 프로젝트는 처음이라 조금 슬펐다. 모든 것이 내내 비합리적으로 돌아갔고 납득이 가지 않는 많은 의사 결정을 최대한 내가 납득할 수 있게 만들어야 했으며, 이번에 이것저것 많이 경험하고 많이 배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인내심이었다.
프로젝트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매우 지긋지긋하고 이 불합리의 끝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그래도 프로젝트는 끝내야 하지 않겠냐고 아득바득 버텼다. 하지만 그 사이에 나는 다음 행보를 전혀 정하지 못했고 이렇게 내년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런 비극이 따로 없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연초에 받아놓은 거대한 마감도 같이 겹쳐서(게다가 상반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서 밀리기까지 했다) 쉴 틈 따위도 없었고 마음에는 부담감만 항상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아쉽기도 했다. 덕분에 마감은 좀 밀렸지만 그래도 12월에는 끝내고 조금은 시원해졌다. 하지만 12월은 전 국민이 즐겁지 않은 때가 되었기 때문에 역시나 나는 즐거울 수 없다.
어쨌든 소소하고 소소하지 않은 일들을 했다. 올해는 그래도 꽤 사람 많은 공개 행사에서 발표를 했고, 학교 강의도 몇 건 했으며, 멘토링으로 몇몇 사람들을 만났고, 기나긴 책 관련 마감을 해결했고(…), 약간의 공부를 하고, 거대한 프로젝트를 했다.
그 사이에 쟈그마한 즐거운 일들도 있었다. ( 땡땡땡 등 참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일들이 조금씩 있었고, 그걸로 아슬아슬하게 버틸 수 있었다. 일하는 곳에도 분명 좋은 사람들이 있다.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망가진 것은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지만- 이미 인내심을 꽤나 기른 것처럼 나에게 시야를 넓혀주는 시간이었다. 가끔은 안 좋은 쪽의 시야를 넓히는 것도 도움이 된다. 타산지석이 확실하게 되게 해주니까.
작년의 후일담을 읽었다. 놀랍게도 건강검진 상태도 굉장히 좋아졌으며, 달리기와 등산도 계속 했고, 올해 10km 달리기에 성공했으며, 요가도 아주아주아주 조금이지만 하고 있다. 의도치 않게 새로운 것을 했고, 가치관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내가 아는 것과 배운 것을 조합해서 더 재밌고 유용한 가치를 만드는데도 성공했다. 물론 내가 생각한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는것이 조금은 비극이지만, 의외로 작년에 말한 쟈근 목표들을 다 이룬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그래서 새해의 목표를 세운다는 것은 좀 우습지만, 새해에 대해서 조금은 의지를 끌어올려보려고 한다. 역시나 새해에도 열심히 움직일 것이다. 올해 운탄고도를 깼으니, 새해에도 뭔가 재밌는 길을 찾아서 도장깨기를 시도해야지. 안 가본 산도 가고 달리기도 또 10km를 뛸 것이다. 건강도 올해보다도 더 좋아진 건강검진 수치를 기록할 것이다. 이제는 좀 더 재밌고 새로운 일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새해에는 이렇게 급하게 일이 진행될 필요가 없기를, 이제는 좀 길고 안정적인 상태로 일을 하길 바란다. 그래서 빠르게 새로운 행보를 찾을 수 있기를, 그래서 조금은 더 합리적이고 인내심을 더더욱 끌어다 쓸 필요까지는 없는 데에서 즐겁고 보다 안정적인 새 시작을 할 수 있기를, 사회가 나의 즐거움을 뺏어가지 않게 되기를, 여전히 좋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감사하면서 주욱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새해에 해야지 생각했던 것은 그럭저럭 했지만, 새해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어렵지 않고 신나는 해가 되기를 바랬지만, 올해는 정말 지긋지긋하게 힘들고 가라앉아 침잠한 해였다. 세상 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큰 파도에 휘둘리다보면 한없이 무기력해진다. 새해에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좀 더 많아지길, 그래서 어렵더라도 내가 손 댈 수 없는 어려움이 아니길 바란다. 지금껏 이렇게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으면 이제는 좀 그래도 되지 않을까.
상황은 좋아질 수 있다. 조금만 참고 기회를 기다리면 대개 그렇다.
그래서, 지긋지긋했던 한 해에 대해 이 정도로 작아진 이야기는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새해는 온갖 재난의 액살은 다 비껴가서,
백천가지 일들이 맘과 뜻 먹은 대로 모두 이루어지고,
말씀마다 향기나고 걸음마다 꽃이 피고
어둔데는 등 돌리고 밝은대로 앞을 돌려
선인 상봉 귀인 상봉 하시라고
천만 축수 만만 발언으로 비옵니다.
그 뒤야 뉘 알소냐. 더질더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