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써야 할까. 보통은 그냥 한 해를 돌아본 감상을 주로 썼는데(그러다보니 뭔가 ‘회고’라고 하면 빡빡하게 본인의 업무역량적 성장을 위한 했던 내용을 정리하고 그 중에서 반성을 한 후에 새해 계획을 세우는 매우 생산적인 글이 되어야 할 것 같아서, ‘후일담’ 정도의 제목을 다는 편이다.) 올해는 그래도 그다지 생산적인 글이 아니더라도 약간의 했던 일들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왜냐면, 내가 올해에 무얼 하고 살았는지 잘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이 글에서도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일단 한 번은 털고 가야지. 땡땡땡 글에서도 썼지만, 올해 역시 신나게 헤메고 다녔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작년보다 더. 그리고 그 과정은 솔직히 말해서 즐겁지 않았다. 그래서, 털고 가되 간단히만.
1. 내내 헤매다.
3개월 - 8개월, 작년에 이어 올해도 두 군데서 혼란을 겪고 여러가지로 이력상 씁쓸한 한 해를 보냈다.
2. 여기저기 아프다.
3년간 안 걸리던 코로나가 갑자기 걸리고, 그나마 며칠만 고생하고 지나갔다 싶었는데 코로나의 후유증인지 스트레스 성인지 체력이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그대로 드러누워서 저녁을 겨우 먹고 다시 드러눕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퇴근 후에 시간은 많으나 뭘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몇 달 내내 이러니 미쳐버릴 것 같았다. 노화가 왔다고 해도(…) 갑자기 이렇게 오는 건 아니지. 정말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을 정도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힘이 없었다.
누가 주려고 하지 않은 스트레스는 혼자서 알아서 받는 통에 공연이나 전시를 미친 듯이 다녔다. 1주일에 한 번도 공연을 안 보는 주가 손에 꼽고, 심하면 1주일에 2-3개까지 공연을 보고 전시를 보러 다녔다. 그리고 그러면 다른 날은 더 힘들어서 드러눕고. 그렇다고 공연을 안 본다고 뭐가 나아지냐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가뜩이나 책도 책대로 사대는데 공연까지 저렇게 봐대니 내가 우리 나라 문화예술계의 빛과 소금이었다 진짜.
코로나 직후에는 갑자기 왼쪽 다리가 너무 아프더니 걷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자다가 갑자기 다리가 너무 아파서 깼다. 살다가 또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다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다가 겨우 약상자로 울며불며 기어가서 진통제를 먹고, 다음날부터 정형외과를 전전했다. 한 군데서는 MRI를 찍자, 수술해야 할 거 같다고 해서 기겁했는데 다행히 여기저기 추천을 받아서 간 다른 곳에서 신경통(…)이라고 해서 그나마 다행히 약과 물리치료를 길게(…) 받는 걸로 마무리는 했다. 하지만 거의 한 달을 진통제가 있어야 겨우 걸어다닐 수 있었고, 한 달에 거쳐서 진통제를 조금씩 줄여서 두 달쯤 지나 겨우 돌아왔다. 계속 해오던 달리기를 가장 달리기 좋은 계절에 전혀 할 수 없었던 것은 서비스 서비스.
어느 날은 화가 너무 나서 버틸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목이 너무 아파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사람의 목이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깨달았다. 목이 아프니까 정말로 몸을 쓸 수가 없더라. 인간의 머리란 또 왜 이렇게 무거운가. 침대에서 뒤척거리기만 해도 아파서 비명이 나왔다. 담이 걸려도 뭐 이렇게 걸리냐 싶었다. 살다살다 이렇게 담이 오기는 또 처음이다. 전의 기억이 있어서 또 진통제를 열심히 먹고, 병원을 갈까 말까 하다가 좀 가야지 싶으면 낫는 것 같고 있다보면 낫겠지 싶으면 또 아프고. 또 이렇게 목을 붙잡고 거의 3주 가량을 끙끙대고.
3. 건강에 관심이 많아지다.
올해는 ‘기력’이라는 단어를 입에도 많이 담고 생각도 많이 했다. 기력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삶에서 많은 것을 가져가는지, 시간이 있어도 누워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란 어떤 것인지, 의욕을 낼 기운도 없고 의욕을 낼 생각마저도 들지 않는 것이 어떤 것인지. 기억과 집중력도 짧아만 가고, ‘아 맞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죠’ 라고 하지만 그걸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 자꾸 반복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올해 너무 잘 알았고, 물론 흔히들 노화의 과정(…)이라고도 하지만 이를 이렇게 갑자기 확 와닿게 받을 생각은 전혀 없기 때문에, 그래도 천천히 올 수 있도록 나를 조금이라도 복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리가 아팠을 때 정형외과를 드나들며 여기저기 뼈의 엉망진창에 대해서(대충은 알았지만) 더욱 잘 알게 되었고, 건강검진에서도 여기저기 안 좋은 징후들이 보여서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등록한 필라테스는, 역시나 기력이 없어서 그냥 집 앞의 쟈근 곳에 등록했고 아마도 다른 곳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계속 하지만 그래도 역시 집 앞이라는 엄청난 메리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계속 하면 여기서도 어느 정도 몸은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지금도 일단 누워서 손이 땅에 닿아!(놀랍게도 누워서 손을 바닥에 붙이는 게 불가능했다…)) 일단 꾸준히 다닐 생각이다.
달리기는 나의 친구. 여전히 달리기를 내가 좋아한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그래도 5km정도 뛰고 나면 기분이 나아지는 게 있어서, 날이 좀 풀리면 다시 또 뛰어야지. 한참 잘 달릴 시기에 다리가 아프면서 몇 달을 거의 쉬게 되는 바람에 올해의 쟈근 목표던 10km 달리기는 저 멀리 사라지고 5km 논스톱도 근근히 달리는 정도지만, 뭐 애초에 꾸준히 뛴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큰 것이라 크게 개의치는 않는다.
모 님 덕분에 몇 번 산에 쫓아갔는데, 요즘 산은 계단도 잘 되어 있고 의외로 가볍게 다닐 만 하더라. (내리막은 고소공포증이 조금 있고 균형감각이 떨어져서 험한 산 안 좋아함…그런 거 굳이 왜 올라가나 모르겠는 전형적인 등산 싫어하는 사람.) 덕분에 맨날 산 시러 거길 왜 가 하면서 쳐다도 안 보던 서울 시내 산도 몇 군데 올라갔고, 꽤 기분이 좋더라. 새해에도 조금씩은 가보려고 한다.
그외에 건강 팁 모아요 모아. (…)
4. 업무 능력 획득
일을 했기 때문에 남는 게 아예 없지는 않았다. 보험 심사라던가 생명보험, 마이데이터, 공공 데이터에 대해서도 들여보고 고민해 볼 기회가 있었다. 컨텐츠 데이터나 스트리밍 서비스의 데이터를 살펴볼 기회도 있었고, 금융 데이터는 얼마나 피곤한지(…)도 새삼 다시 알았다. 모든 데이터가 그렇지만 내부의 비즈니스 프로세스와 엮인 데이터를 본다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고, 다시 한 번 나의 훌륭한 도메인 습득력을 칭찬해(음?).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살다보니 여기저기의 도메인과 도메인에 얽힌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해결 방안을 찾아보는 기회가 있었는데 이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도, 주어진다고 잘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얼마나 본투비 산업공학적 인간인가(음?).
올해도 좋은 사람들과 일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 분들이 나에게 많이 배웠다고 하셨지만, 나 역시 그 분들에게 배운 것이 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 경력 차이에 상관없이 뭔가 배울 수 있다.
귀찮다고 노래를 부르긴 했지만 어쨌든 우예우예 들어간 ML GDE. 기력이 부족해서 사실 제대로 활동도 못하고 끼지도 못하며 심지어 메일도 제대로 못 읽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덕분에 급하게나마 전에 궁금하던 BQML도 좀 더 들여다 볼 수 있었고 심지어 덕분에 우즈베키스탄에 초대받아서 가는 싱기한 기회도 있었다. 다시금 나를 추천해주신 모 님께 감사드리며 새해에는 발표한 거 조금 더 다듬어서 자료도 만들고 코드도 올리고 해야…하는데… (사실 발표 끝나고 하려고 했지만 역시 드러눕느라.)
내가 매우 애정하던, [파이썬으로 배우는 베이지안 통계] 2판 번역도 무사히 마쳤다. 잡음이 많았지만, 책 자체는 내가 초판을 번역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아끼고 애정하던 책이었고 2판도 함께 해서 뿌듯하다. 새로 저서도 하나 나왔다. 하지만 이에 대한 건 정식 출간일인 내년의 성과로 넘기기로 한다. 사실 이 책은 숫자유감 이전부터 준비하던 책이라서 올해는 그냥 진행만 했을 뿐이다. (물론 진행과 교정 자체도 꽤나 수고로운 일이다.)
5. 올해 얻은 자세
이렇게까지 해야 해?.. 싶은 것을 이렇게 이상으로 해야 아주 작은 움직임이라도 있다는 것.
이제는 모든 일을 이렇게 접근하는 게 어느 정도 기본 탑재된 것 같다.
6. 약간 더 신경쓸 것들
여전히 나를 믿는 데 익숙하지 않다. 지를 데는 섣불리, 고민은 혼자 하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사람들에게 물어보거나 의지하는 데도 여전히 서투르다. 내년에는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하고, 좋은 사람들에게는 좀 더 의지하고 먼저 물어보는 데에 더욱 익숙해질 것이다. 사람 보는 눈도 여전히 서투르다. 나의 감을 좀 더 믿어도 괜찮을 것이다. 항상 나의 감을 의심하다가 사람들을 잘못 선택하거나, 괜히 주저하거나 했다. 돌아보면 이해는 하지만, 그럴 필요 없었던 것들. 좀 더 뻔뻔하게 좀 더 질러봐야겠다. 전보다 그래도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만, 새해에는 좀 덜 소심하고 더 뻔뻔해지는 것을 고민하자.
7. 새로운 시작을 기약하다
기력없고 여기저기 아픈 것은 너무 지긋지긋했다. 상반기 후일담을 보아도 내내 기력이 없었지만, 어떻게든 잘 해보자였지만, 하반기에는 아무리 안정성이 좋아도 이건 아니다(늘 이러다 망하지만) 싶은 순간이 결국 와버렸다.
머리를 가누지 못하던 때, 침대에 뒤척이지도 못하고 정자세로 누워서,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상황을 본 후에 일단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한 달 정도 집에서 겨울잠(?)을 자며 요양(?)을 하고 있고, 이제는 아픈 데 없이 잘 지낸다. 기력이 완전히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여전히 누워있는 게 너무 좋고 잠을 많이 잔다. 기력은 일을 해야 알 수 있지 않을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니, 아예 아무 것도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나는 독거노인이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은 운이 좋아 어쩌다 한 달 정도는 놀 수 있지만 새해부터는 어떻게든 다시 경제활동을 해야 하니까. 그래도 최대한 생각을 비우고, 최대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때리다 보면 하루가 지나간다. 그렇게 시간을 술술 흘려보내고 있다. 시한부의 호사다.
쉬는 것은 좋다. 어느 정도 독기가 빠지고 다 지난 일이 되어서 그런지, 그냥 (다시는 하고 싶지 않지만 나중에는 조금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새로운 경험치를 쌓은, (몰랐으면 더 좋았을 수도 있지만)삶의 다양성의 저변을 넓힌 한 해였다. 나의 앞길은 뿌옇고 혼란스럽기만 하고, 독기를 빼는 데 집중하느라 정작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도 고민하지 않았지만, 뭐 그만큼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물론 나는 경제활동을 해야 하고 내년에는 돈이 나갈 일들이 이미 꽤 정해져 있어서 빠른 시일 내에 또 뭔가로 떠내려 가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될 것이다.
다만 조금 더 신중해지고, 조금 더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귀찮게 하며, 조금 더 칭찬과 욕을 많이 듣고, 좀 더 내 멋대로 하고, 내 생각을 두 세 번 더 의심하는 사람이 되어보자는 정도는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길은 올해가 밀어줄 것이다. 다시 쳐다도 보고 싶지 않은 해기는 하지만, 이 해가 가고 새해가 온다고 해도, 시간은 연속적이고 그저 사람들이 편의를 위해 만들어 둔 단위의 숫자가 바뀐다고 갑자기 천지개벽을 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이번 단위가 날아가고 새로운 단위가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마치 없었던 일이 되지 않고, 이 기간이 나에게 준 것이 분명 나의 구성성분이 되었음을 알고, 그래도 이 것이 더 단단하고 제멋대로인 나를 만들어주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기반은 분명 나를 나쁘지 많은 새해로 힘껏 밀어줄 것이다. 송구영신이란 이런 것이라고, 아무도 보장하지 않는, 그런 쓸데없는 믿음을 갖고 새해를 기다려본다.
일단 새해에는 건강하고, 기력이 넘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노력해야지.
그 뒤야 뉘 알소냐. 더질더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