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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회고

사진 출처: @Night_of_Sheep 트위터

단골인 모 술집에서는 연말 연초마다 이상한(?) 이벤트를 한다. 연초에 올해 하지 말 것을 적어서 접어서 병에 모아서 보관한다. 그리고 연말에 자신이 적은 것을 찾아볼 수 있다. 12개월이 얼마나 된다고, 내가 뭘 적었는지도 까먹고 있다가 연말에 보면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술을 마시는 게 나름 묘미다.

올해도 어김없이 술집 사장님께서는 내가 올 초에 적은 쪽지를 건네주셨고, 나는 그 쪽지를 당당하게 펴 보았고, ‘잘 기억은 못 하지만 별 거 없을 줄 알고 있었고 역시나 별 거 없네요’ 라면서 당당하게 술을 마셨다.

그렇다. 사실 적었다가 굳이 지른 것도 없었고, 적은 것도 별 것 없었으며, 그나마 하나 안 지킨 것은 ‘도장 열심히 나가자’ 였는데 자의 반 타의 반 이기도 했고 이 것에 대해서는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다지 후회는 하지 않으므로 크게 상관이 없다.

그러니까, 내가 사는 것은 다 이런 식이다. 어차피 스트레스에 취약한 인간이니까, 자체적으로는 나 자신에게 어떤 제약을 거는 것을 가능하면 피한다. ~해야만 하는 것 부류. 그리고 이제는 그런 것이 정말 체화되어서, 나 자신을 너무 풀어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죄책감이 들 정도로 내버려둔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이렇게 계획 없이 살아도 괜찮은가.

하지만, 괜찮지 않다면 또 어쩔텐가.

작년의 회고를 읽어보았다.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얄팍한 소망이 있으면서도, 자신의 삶에 대해 자책하지 않고, 이렇게 좀 더 단단히 살자고 했던 회고. 그 회고의 선은 그대로 이어졌다. 나 자신을 내려놓는 게(좋게 말해서), 내버려 두는 경향은 점점 강해졌고, 그 것이 극대화된 것이 올 한 해였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그다지 크게 반성할 생각도, 크게 고칠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내가 잘난 사람이어서도, 나 자신이 썩 마음에 들어서도, 혹은 내가 관대한 인간이어서도 아니다.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이 조금 부끄럽고, 썩 마음에 들지도 않다. 그저 내가 아직 나 같기 때문이고, 나 자신에 질리지도 않았고, 나 자신이 지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자신을 압박해서 어떻게 변해야 한다라는, 의무감이 발등에 떨어지지도 않았고, 웬만해서는 그런 의무감을 자신에게 떨굴 생각이 없기 때문일 뿐이다.

나의 올해가 썩 좋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잘 살고 있느냐는 질문에 솔직히 한 순간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순간이 있었나. 내내 엉망진창이었고, 무언가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제대로 해낸 것은 별로 없고, 무기력해지지는 말자고 했으나 수시로 무기력해졌고 사실 지금도 무기력하고, 올 초에, 올해는 이런 건 해야겠다고 아주 소소하게(?) 적어놓은 것들은 7개 중 4개밖에 지키지 못했다. 하나는 역시 도장 다니는 것이었고, 하나는 하다 만 소소한 것. 하나는 바꾸기 어려운 것. 사실 잊고 있었다. 체력은 급속도로 약해졌고, 종합병원 선물세트 같은 인간에게 무릎 염증이라는 증세까지 추가되었으며, 잠이 많아졌고, 원래도 게을렀지만 더욱 더 적극적으로 게을러졌다. 무색무미무취한 인간에 어떤 엷은 색을 칠하거나 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젖은 낙엽같은 안정성은 여전히 머나먼 이야기가 되었다. 저만치 떨어진 삶은 유지하고 있지만, 그렇게 예쁘게 서 있는 모습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작년에 하기로 한 것들을 마무리한 것들 외에는, 그래, 안타깝게도 솔직히 뭐 했는지 잘 모르겠는데 시간은 갔고 나는 더욱 더 알 수 없는 곳에서 떠다니는 한 해였다고 밖에는 못 하겠어서 아쉽다. 굳이 따져보자면 그렇다.

하지만 조금 슬프고 아쉽지만, 내가 뭘 다르게 해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잘 버티고 있으니까, 그렇지. 매일 내내 흔들리고, 치이지만, 뒤집히지도, 가라앉지도 않았다고 생각하고, 그러면 된 거 아닌가. 이렇게 엉망진창이고 허술하면서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게 어디인가.

그러니까 됐다. 돌아오는 새해도, 새해라고 별 것 있겠는가, 나는 여전히 나 자신에게 어떤 강요같은 걸 할 생각이 없이, 더욱 삐그덕거리면서 흔들리면서 살아낼 것이다. 좀 더 예쁘고, 멋지게 살면 참 좋겠지만 그걸 심하게 강요할 생각은 아쉽게도 별로 없다.

다만 꽤 큰 위기감은 있다. 요즘 종종 반 농담조로 ‘전직하고 싶다’ 라고 노래를 부르는데, 사실 이 것은 꽤 진심이다. 물론 내 일에 대해서 좀 질린 느낌도 있지만, 그래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내 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꾸역꾸역 버텨온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안되겠다는 위기감은 점점 더 커져가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다. 전에는 시대가 어떻게 바뀌어도 내 일은 필요한 것이니까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있고 이런 생각은 지금도 어느 정도는 유지하고 있지만, 내가 이대로는 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뭘 해야 하고 뭘 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그저 미지수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은 안다. 물론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없고 아무런 기력이 없다. 하지만 이 무기력증은 한시적인 것일 것이고, 무언가는 변경되어 있을 것이다. 일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는. 아마도 내년의 나 자신에게 미약하게나마 부여할 유일한 과제.

이 가게에서 과연 내년 초에도 또 저 노란 종이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적는 이벤트를 할까? 물어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약에 적어야 한다면 최소한 하나는 적게 될 것이다. ‘지금과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일을 하며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말자’. 그리고 내년 연말에, 이 종이를 보게 되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한숨만 쉬지 않으면 좋겠는데.

“It’s no use going back to yesterday, because I was a different person then.” ― Lewis Carroll.

    This post is licensed under CC BY 4.0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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