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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아이슬란드 여행 후기

  • 기간: 2018년 2월 10일~2월 17일 (6박 8일)

언젠가부터, 아이슬란드에 가고 싶었다. 아마도 그 시작은 [프로메테우스]에서의 데티포스였던 것 같다-잊고 있었는데 여행을 간 후에 꾸역꾸역 기억을 겨우 되살렸다. 그럼요 프로메테우스는 좋은 영화입니다. 우리 데이빗이라든가! (…) -. 그리고 사진으로만 접하던, 그 적막하고 서늘하고 고요한 곳, Sigur Ros나 Olafur Arnalds 같은 뮤지션들의 음악에서 녹아나는 이그러진 적막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멀고, 가서 돌아다니기 어렵다는 이유로 간간히 구경만 하면서 마음을 접어두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돌아오는 명절에는 어디든 떠나고 싶었고, (물론 언제는 안 그렇겠냐만) 한참 심신이 지쳐있었고, 마침 그 때 하던 거대한 번역 건도 정리가 되어가던 참이었다. 너절한 삶일 수록 간절해지는 것이 여행이라지 않던가.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니터에는 아이슬란드 여행 예약 완료 화면이 떠 있었다.

뭐, 다 이렇게 시작되는 것 아닐까.

시작부터 쉬운 여행은 아니었다. 나오기 전까지 너무 정신이 없었고-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전날까지 짐도 못 싸고 있다가 당일날 아침에 겨우 일어나서 집에 있는 유로화와 여권과 핸드폰을 챙기고 큰 트렁크를 꺼내서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던져넣고, 전자책 기기 비밀번호 까먹어서 결국 그냥 책을 꾸역꾸역 들고 오는-이 것은 나중에 매우 잘 한 일로 결론이 났다- 상태여서 여행 준비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준비할 여력도 없고 혼자 운전해서 돌아다닐 자신이 없어서 투어 프로그램을 선택한 통에 -물론 편하고 좋은 분들과 지내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었지만- 낯가림의 본성은 어쩔 수 없으며, 비행기 연착 후 피곤함과 정신없음 속에 맞딱뜨린 차가운 눈의 감촉과 함께 다가온 스산한 낯섦의 3단 콤보.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고, 3단 콤보의 불안함은 본격적인 눈보라와의 투쟁으로 나타났고, 일정표의 ‘해당 일정은 기후 및 도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의 문구가 제대로 와닿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날씨는 내내 우리를 괴롭혔다. 장시간 호텔에 갇혀 있기도 했고, 도로 사이트에서는 매번 closed, impossible 등의 문구와 함께 빨간 선이 잔뜩 그어진 지도를 보여주었으며, 오늘은 어디를 보게 될 지도 예측할 수 없었다.

자연의 모습은 변화무쌍하다. 사람의 의지로 어떻게 손을 댈 수 없다. 자연의 모습이란 그 모습 자체의 아름다움 뿐만이 아닌 예측 불허함이 더해짐으로써 의미를 가진다(신일숙이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 이야기한 삶의 모습이란 어쩌면 자연의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각각의 사람이 보는 자연의 모습은 어쩌면 순간의 우연에 가까운 모습이다.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이 남긴 것들과 만나는 연과는 또 다른 모습의 연. 그래서, 이런 대자연을 만나는 여행은 더욱 더 이런 연에 기대고 있다. 아마도 이런 연과 가늘게 이어질 듯 끊길 듯 하면서, 찰나의 연을 가지는 것이 이런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이번의 여행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큰 기대를 가지고, 가장 많이 화두에 오르는, 오로라 역시 어떤 연에 의해서 만나게 되는 것이리라.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오로라를 볼 수는 없었다. 사진기에서나 겨우 확인할 수 있는 녹색 안개 정도가 끝이었다. 아마도, 우리의 연은 이번에는 여기까지였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다.

하지만, 그만큼 다른 아름다운 것들과 또 다른 찰나의 우연으로 만났다. 유라시아 판과 아메리카 판이 만나던 곳의 이지러진 검은 땅, 눈이 쌓인 지평선과 어우러진 민트색 호수, 작은 간헐천과 함께하는 겨울의 노천탕 시크릿 라군,레이캬비크에서 누구나 다 구경하는 할그림스키르캬(발음 어렵다…),파란 하늘과 어우러진 하르파,썬 보이저. 하얗게 눈덮인 이끼 공원, 파랗게 빛나던 동화같은 마을, 하늘에는 별이 쏟아지고 지상에는 물이 쏟아지던 한밤의 셀라란즈 폭포. 추위 속에서도 그 자리에 몇 분을 멈춰 서 있게 했던 굴포스의 광대하면서 우아한 낙수, 게이시르의 긴 기다림, 찰나의 폭발이 주는 감동, 그리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싱벨리어의 아름다움이란. 하늘과 물과 빙하와 눈이 하나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기이하게 아름다운 빙하 동굴과 빙하. 숨이 멎을 것 같은 이세계의 적막과 빛.

다른 소소한 아름다움과도 닿아있었다. 한파에 우연히 만난 식당, 호텔에서 만난 스웨덴에서 많이 파는 말 목각인형(달라헤스트)을 닮은 아이슬란드 조랑말, 흥미로운 음반 가게와 번역서 리스트들에 즐거웠던 서점, 맛있는 커피,..

사실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다. 눈보라에 갇혀서 창 밖으로 하얀 세상을 보면서 호텔 방에서 홍차를 마시면서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을 읽던 순간마저도 평온했다. 파란 하늘의 새하얀 눈밭, 맑고 파랗던 하늘, 눈부시게 파랗던 해질녘, 눈보라에 하얗던 세상, 검고 푸르게 빛나던 빙하동굴, 푸르고 하얀 층을 그대로 드러내던 빙하, 어둠 속에서 거대하게 쏟아지던 폭포 옆에서 또 다르게 쏟아질 듯 빛나던 별들, 길 위에서 엷게 녹아내린 얼음 위로 쏟아질 듯 하던 하얀 산들, 그리고 또…

사실 어떤 장소가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는 지도 모른다. 여행 내내 쉴새없이 환상적인 모습이 쏟아졌고, 나는 그냥 최대한 끊임없이 신비한 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다. 하나라도 놓칠새라 조금 두려워 하면서.

나의 사진은 너무나도 별볼일 없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사진은 그저 그 때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매개체가 될 뿐이다.

두려움 가득한 여행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내내 여행은 빛났고 아름다웠다. 아마도 그래서 그 아름다움이 더 돋보였는지도 모른다. 그 빛에 다른 파장을 전해준 같이 여행한 분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여행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 같은 여행이라고 해도 각자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되지만, 다른 분들도 나만큼 아름다웠다고 생각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나도 약하게나마 좋은 파장으로 반사되었기를 바란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때의 파랗고, 하얀 세상, 빛나던 빙하와 아찔하던 바람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돌아온 후에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때까지 우리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 계속, 나는 지금도 여행 중이다. 그 파랗던 세상을.

    This post is licensed under CC BY 4.0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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