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너절할수록 여행이 간절해진다.
만사가 불쾌하고 사는 의미도 목적도 없는 시기가 있다. 이럴 때 일상을 꾸역꾸역 잠시나마 버티게 해주는 것은 나의 경우에는 비행기 티켓이다. 이런 부조리를 왜 버티고 있지? 싶을 때 예약된 비행기 티켓을 한 번 보면 그나마 마음이 나아지고 꾸역꾸역 부조리함을 목구멍으로 삼킬 힘이 생긴다.
일상의 너절함에 버틸 수 없던 얼마 전, 마침 가을 쯤에 여행 생각이 있으시다던 모 님이 생각나서 연락을 드렸다. ‘스리랑카 생각이 있긴 한데…’ 라는 말에 냉큼 잡았다. 어디든 안 가본 데.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우당탕탕 나의 충동적 여행 계획은 진행되었고 부조리함을 소화시킬 비행기 티켓을 얻었으며 휴일을 끼어 대충 열흘간 탈출할 시간을 우예저예 얻어냈으며 부조리함 속에 영원히 안 올 것 같던 여행의 날도 어떻게든 도래했다.
여행 경로는 대충 이렇다.
10/2 : 콜롬보 공항 도착. 유심 구입 및 환전 후 숙소 픽업으로 니곰보 호텔 도착. 니곰보의 아아 이것이 로컬 해변! 싶은 바닷가를 산책하고 저녁 식사. 이것이 남쪽 해변가인가 싶은 온도와 습도에 왜 날씨 좋아지는 한국을 탈출해서 사서 고생인가 생각함. 덕분에 저녁에 마신 맥주가 시원함.
10/3: 택시 타고 시기리야로 이동. 피두랑갈라 락에 올라가서 시기리야 락과 일몰을 봄. 왜 아무도 이 바위(?) 기어올라가기가 일케 어려운 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나. 오르는데 2-30분가량밖에 안 걸리지만 불규칙하게 높은 바위 계단에다 나중에는 거의 사족보행해야 하던데. (나중에 표 사면 주는 팜플렛에 ‘체력과 상태에 따라 오르기 어려울 수 있다’ 문구 보고 기함함) 그래도 경치는 정말 좋았다.
10/4: 당일치기 폴론나루와. 폴론나루와…정말 너무 아름다운 고대도시 유적… 아름다운 여름햇살을 맞는 스러져버린 도시의 흔적…정말 너무 끝내주지만 여름이었다. 그 잊지 못할 조도 온도 습도 특히 온도…체감온도 40도…. 정신은 혼미해지고 마음 같아서는 더 있으면서 계속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보고 싶던 곳은 가지도 못했다 세상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은 기억 중 하나이고 그래서 더 미련이 남고(질척거림)
10/5: 아침 일찍 최고의 목표 중 하나던 시기리야락 등반. 입장료는 비쌌지만 기대보다 바위 꼭대기 고대 도시는 좀 심심했고 오히려 굉장히 잘 남아있는 미인도 벽화에 감탄했다. 하지만 바위를 둘러싼 철계단에서 고소공포증으로 인한 어지럼증이 덮쳐서…너모…힘들었다… 그래도 좋았다. 내가 저 위엄있는 바위에 올라갔는데…!
내려와서는 담불라로 택시 이동. 좁고 매연 가득하고 피곤한 도시였고 어찌어찌 이동해서 본 석굴 사원은 굉장했다. 정말 온누리에 부처님이!
10/6: 오전에 택시로 칸디에. 불교 박물관은 좋았고 잠시 옛 궁궐 터에서 늘어져있다가 불치사에 행사를 보러 갔고 행사는 거의 구경도 못했지만 엄청난 인파의 신앙적 정념의 힘에 압도당했다.
10/7: 높은 곳에 올라가 칸디 전경을 보고 기차를 타고 누와라엘리야로 이동. 푸른 길은 좋지만 의자가 너무 힘들고 그 와중에 연착해서 더 힘들었다. 대중교통 잘 타고 다니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나라 대중교통이 좋은 것으로… 도착 후에는 간신히(?) 그랜드호텔에 가서 하이티.
10/8: 아침일찍 호튼플레인스 국립공원으로 툭툭을 타고 이동해서 트래킹. 세상의 끝(?)을 보았고 예쁜 폭포도 보았고 평원! 넓다란 평원! 즐겁게 걸었다네.
세상의 끝을 보았지만, 나의 갈 길은 아직 멀었다네.
10/9: 스리랑카 하면 떠오르는 건 역시 실론티. 그 중 우바 중에서도 가장 애정하는 누와라엘리야 티. 아침 일찍 빅토리아공원과 동네 구경을 조금 하고 차밭과 차 공장 두 군데에 들러서 차 마시고 지르기도 하고 엘라로.
10/10: 나인아치브릿지를 보러 걸어서. 전날 밤에 날씨가 워낙 안 좋았고 유명한 다리 위 열차도 안 다닌데서 가봐야 뭐하나 싶다가 우예저예 갔는데 날씨도 맑고 촬영용 기차가 딱 타이밍 좋게 움직여서 좋은 그림을 보았다. 하지만 여기를 이동하다가 숲길에서 거머리가아아아아아. 긴 바지에 긴 양말을 신고 바지도 발목을 조이는 형태지만 다 소용없었다. 하 거머리 이야기는 들었어서 정작 산행이나 트래킹에는 산악용 레깅스에 양말로 단디 채비했는데 이 때는 숲길인 줄도 몰랐어서 대충 방심했다가…거머리가 허벅지까지 기어올라서 피를 빤 데다 피가 안 멈춰서 바지가 피로 젖은 후에나 알았다 세상에. 캬아아악.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덕분에 기가 빨려서 좀 쉬었다가 마사지 받고 맛난 거 먹고 하냥하냥.
10/11: 스리랑카에 더 남아계시는 동행분과 헤어져서 콜롬보로 이동. 차로 이동해도 거의 6시간 걸리는 거리인데다 불쾌한 택시기사를 만나서 싸우고 돈도 왕창 뜯기고, 콜롬보는 폭우가 쏟아지고 엉망진창이었어서 일부러 인도양의 석양을 보겠다! 는 마음으로 바닷가 호텔에 갔지만 석양은 커녕 햇살도 못 보고… 하지만 아서 C.클락의 묘비를 찾았지!!!
10/12: 아침 일찍 공항으로 이동. 출국수속이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너무 초스피드로 끝나서 시간이 왕창 남아서 추가로 차를 더 사고(야) 돌아옴.
전반적으로 이동을 많이 했고 날씨 운이 안 좋은 날도 꽤나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이것저것 많이 보고 많이 먹고 푹 쉬고 즐겁게 있다가 돌아왔다. 내가 스리랑카라는 나라를 가 볼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갈 일 없을 가능성이 많지만, 스리랑카는 꽤 편안하고 좋은 나라였다. 적당히 영어도 통하고 사람들도 전반적으로 좋은 편이고 딱히 어렵거나 피곤하거나 한 일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야채와 과일과 차도 맛있고, 걱정하던 것보다 숙소 컨디션들도 좋아서 잠도 대개 잘 잔 편이었고 모기에 엄청 뜯기고 거머리에 물린 것만 빼면 다치거나 아프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니, 얼마 되지 않았던 여행은 너무나도 전생같고, 현실은 피곤하며, 앞날은 세상의 끝에서만큼이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나는 내년에는 무엇을 할 지도 걱정해야 하지만, 그래도 또 한동안은 여행의 기억으로 버틸 수 있다. 돌아온 후에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때까지 우리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뜨거운 햇살 밑의 폴론나루와 유적과, 해질녘 햇살을 받던 시기리야 락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금 현실의 부조리를 삼킬 힘을 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