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기저기에서 ‘취향(taste)’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취향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종종 언급될 수 있다. 다만 이게 일하는 분야에서 나온다는 것이 문제다.
나는 ‘취향’ 이라는 단어에 다소 예민한 편이다. 아무래도 예전부터 나의 ‘취향’이라는 것에 대해서 정말로 많은 고민을 했기 때문이다. 나라는 개인을 정의하는 수많은 특성(인상, 성격, 업적 등)이 그다지 보잘것없고 그나마도 흐릿하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고, 그 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것 중 하나가 ‘취향’이란 게 별로 없고 있어도 흐릿하다는 것인지라, 이에 대해 오랜 시간 늘 마음 한 켠에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늘 ‘취향’이라는 이야기가 어쩌다 나오면 깊은 생각에 빠져버리고는 한다.
그리고 요즘에 의도치 않게 깊은 생각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갑자기 AI 분야의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취향’을 언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취향’이 AI 시대 최후의 경쟁력이라며 어쩌고 저쩌고. 나는 기존의 깊은 생각 이상의 깊은 생각에 빠져버렸다. 기존에도 아쉬운 나의 얄팍한 취향이 이제는 먹고사니즘의 경쟁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가뜩이나 AI시대 너무나 힘이가 드는데 대체 뭘 더 어쩌란 거지 기타 등등.
하지만 추가적인 깊은 생각에서는 이제 벗어났다. 근본적인 깊은 생각 정도는 어쩔 수 없겠지만…
이 업계에서의 ‘취향’같은, 다소 예술적이고 모호한 단어는 스티브 잡스가 대표적으로 잘못하고(?), 그 전후로도 은은하게 내려왔던 이 업계의 ‘있어빌리티’병이라고 생각한다. 명확하지 않은 정의의 평소 안 쓰던 다른 단어를 모호하게 가져와서 쓰면서 ‘니네 이거 없지 난 있는데’ 같은 식으로 이야기하면서 기술을 예술인 양 전유하는 것. 대표적인 단어로는 ‘인문학’이 있다.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 이야기 하나 했다가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사방에서 갑자기 정의되지 않은 ‘인문학’을 갑자기 찾아댄 것을 보면(이미 존재하던 수많은 인문학 어리둥절).
그리고 사실 ‘취향’ 이란 단어도 스티브 잡스의 유산이다. 스티브 잡스가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해서 ‘no taste’ 라고 한 것이 이 업계에서 꽤나 유명한 ‘taste’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 이후로 잊을 만하면 가끔씩 ‘taste’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가, 요즘에 AI의 불안과 함께 갑자기 빵 터진 것이니까. 사실 ‘taste’도 ‘인문학’에 가려져 있던 단어긴 하지만 굉장히 뭔가 있어보이는(?) 단어고 최근의 임팩트는 가히 애플 전성기의 ‘인문학’ 못지 않다. 갑자기 평소에 고려도 안 하던 ‘취향’이라는 단어를 쓰면 뭐가 있어보이고 나에게는 결핍된 무언가처럼 보이고 여기저기에서 이 단어에 대한 동경과 불안과 본인의 결핍 등 다양한, 생각이라는 이야기에 숨긴 감정을 말한다. 평소에 나의 반도 ‘취향’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던 주변의 n명 정도의 사람들도 ‘취향’이라는 단어에 반응을 보이는 것 보면.
하지만 스티브 잡스가 말했던 기술에 예술적이고 심미적 안목을 결합하는 뉘앙스의 ‘taste’와는 또 달리,최근에 이야기하는 ‘taste’라는 단어는 오히려 더 실용적인 ‘가치관(value)’과 묘하게 얽혀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 ‘취향’ 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것이 완벽하게 ‘taste’만으로 분리되어 있기는 힘들다. 대부분 ‘선호(preference)’, ‘가치관(value)’, 그리고 이와 관련된 ‘애정(affection)’ 등이 복잡한 층위로 얽혀 있다. 게다가 여기에 ‘업계 최고 표준(best practice)’와 본인이 처한 도메인과 직업적 환경 하에서 자연스럽게 체화된 ‘직업적 아비투스(professional habitus)’까지 기이한 형태로 얽혀있다.
그래서 여기에서의 취향은 다소 그 정의가 애매하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취향과 다소 그 범주가 다르다. 요즘에 남용되는 ‘취향’은 내가 그간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깊은 생각에 빠져 온 문화적 선호도 같은 것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개개인이 경험적으로 학습하고 체득하면서, 거기에 본인의 가치관과 원칙이 살짝 가미된 일종의 ‘반사 신경’ 같은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것을 ‘직업적 아비투스’까지는 차치하더라도 ‘가치관’이나 ‘숙련도’같은 말을 두고 ‘취향’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런 ‘반사 신경’은 ‘두괄식’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무언가를 검토하고 가려냄에 있어서 상세한 이유를 사유하기에 앞서 그동안의 학습된 내용과 가치관이 빠르게 작동하면서, 마치 반사신경이나 즉각적인 감각이 발현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다가 늘 그렇듯이 업계 특유의 ‘있어빌리티’를 살짝 끼얹어주면, 이 다소 다른 기이한 형태가 뭔가 있어보이는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며 범주를 넓혀버리게 되었다.
물론 이런 형태의 ‘취향’은 이른바 AI시대에는 분명 중요하며, 정말로 최후의 경쟁력이라고 볼 수도 있다. AI는 엄청난 속도로 많은 지식과 결과물을 쏟아내지만, 이 결과물에 대한 아무 책임을 지지 않고, 학습에 있어서 자체적인 주관이 들어간 것도 아니다. 과거의 지식과 거기에서 추가로 파생된 지식을 학습하지만, 어떤 경험적인 판단, 선호도, 가치관 같은 것은 이들의 몫이 아니다. 이런 것이 주어지지 않은 결과물은 그저 매끄럽고 무난한, 주어진 일에 대한 ‘통계적 정답’일 뿐이다. 이런 ‘취향’을 시작부터 주입하고, 그 일의 결과에 그 취향을 배가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결국 ‘최후의 경쟁력은 ‘취향’이다’ 라는 말의 뜻은 인간은 더 이상 ‘직접 일을 수행하는 작업자’가 아니라 AI라는 작업자의 작업을 검토하고 결과를 검수하는 ‘편집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취향’이란 무수한 AI의 산출물을 빠르고 날카롭게 가이드하고, 필터링하는 일종의 잣대다.
그래서 ‘취향’이란 말에 깊은 생각에 빠지는 나도, 다른 사람들도, 갑자기 어디선가 등장한 이 트렌디한 단어에 흔들리고 깊은 생각에 빠질 필요는 없었다. 평소에 버려두던 예술적 감각이나 인문학적 사고를 굳이 박박 긁어내어 전시하거나 안 어울리는 힙스터가 될 필요도 없다. 그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나의 직업적 아비투스와 가치관, 원칙 같은 것을 돌아보고 벼려내고, 이를 AI와의 협업에 잘 녹여낼 수 있으면 된다.
…까지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지지만, 약간의 우려도 있다. 지금까지 IT업계에서 항상 있어왔던 선호도 전쟁과, 그로 인한 아비투스의 충돌이다.
직업적 아비투스 역시 특정 조직 문화와 업무 환경 속에서 형성된다. 생존과 빠른 시장 검증, 효율성이 우선되던 스타트업 환경이 익숙한 사람의 아비투스와, 대규모 금융망이나 빅테크 환경의 아비투스는 분명 다르다. 그리고 무엇이 낫니, 뭐가 잘못되었니 하는 이야기는 예전부터 심심치 않게 들렸다. 하지만 ‘취향’이 경쟁력이라며 보다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는 ‘AI시대’에는 이런 충돌 역시 다른 양상을 띨 수 있다.
과거에는 이런 충돌도 ‘물리적인 시간과 수고’라는 완충 지대가 있었고, ‘조직의 컨벤션’ 같은 명분도 있었다. 이런 제약사항 아래에서 그래도 그나마 완만하게 ‘서로 다른 것’ 이라는 타협 하에 이런 개개인의 ‘취향’은 다소 쉽게 물러설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사람이 실행에 드는 비용과 시간이 점차 0에 수렴하게 되고, 어떤 타협의 완충지대는 점점 좁아진다. 작업자는 이제 완성된 결과물만을 가지고 본인의 잣대로 필터링하게 되고, 여기에서 각자의 필터-취향-는 전방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이 때 서로 다른 배경에서 형성된 아비투스 간에는 충돌이 더 커지기 쉽고, 이는 여기저기에 부작용을 남길 것이다. 제품 개발에 있어서까지 사내 정치의 영향이 커진다든가, ‘컬처 핏’이라는 모호한 단어가 ‘취향’으로 확장되며 업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든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아키텍처가 횡행한다든가 등등.
물론, 무색무취의 취향으로, 혹은 그 취향을 전시할 기력도 없이 그냥 AI가 주는 대로 무조건 OK를 클릭하며 ‘적당히 훌륭한 평균적 결과’를 답습하는 안온한 자세는 취하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취향’이 아집으로 굳어지고, 마치 자신의 ‘직업적 아비투스’가 어떤 배경적 서열에서 기인한 객관적인 우월한 ‘미학’인 양 포장하는 지적 스노비즘에 빠지는 것도 그만큼, 혹은 좀 더 위험한 일인지도 모른다. 얼마나 좋은가. 자신의 잣대를 우월한 ‘취향’으로 번역하고 동료의 반대되는 ‘취향’을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전에도 IT업계에는 이런 경향이 강해서(그리고 이런 경향을 가진 사람들을 다소 긍정해주는 경향도 있었고) 문제가 되었지만, 그럴 기회는 많아지고 그러기는 더욱 쉬워진다. 그저 ‘내 우아한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너희의 안목이 부족하고 취향이 얄팍한 것’이라며 타인의 기준을 깎아내리기도 편해진다. 얼마나 우아하고 있어보이는지. 실행의 과정은 장벽이 되기도 했지만 일종의 완충 지대가 되었고, 이 공간이 사라진 자리에는 독단적 스노비즘만이 남아, AI의 장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채 조직과 협업을 갉아먹는 벽이 될지도 모른다.
빠르게 변하는 분야는 결국 수많은 단어 거품이 있고, 그 거품에 떠다니는 단어 역시 빛을 받아 눈부신 무지갯빛을 띠고 있어 정작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건 늘 있어왔다. ‘취향’ 이란 단어 역시 그런 형태다. 하지만 그런 포장은 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런 단어는 그 거품을 터뜨리고, 단어의 정의를 또렷이 보고, 거기에서 내가 취해야 할 것을 찾아야 할 뿐이다. 이에 적절한 개인의 ‘취향’을 잘 벼리고, 내 취향은 결국 나의 경험과 학습에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타인의 취향과 배경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가지는 게 AI 시대에 이야기하는 ‘취향’ 이라는 단어를 맞이하는 자세가 아닐까.
덧.
나는 이제 ‘취향’이라는 단어에 이끌려 깊은 생각에 빠져도,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지는 않다. 나의 취향은 그럭저럭 괜찮다. 나의 흐릿함은 어딘가에 애정을 쉽사리 싣지 못하고, 이에 따라 선호가 쨍하게 선명하지 않은 것에서 오는 아쉬움이지, 취향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그 아쉬움의 형태를 인지하고 있으니 괜찮다.
나의 일반적인 취향 자체는 꽤 괜찮게 학습되어 있고, 그 지평을 넓히려는 습관도 일반적인 사회인으로서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괜찮다. 그리고 이런 자세는 AI 업계에서 말하는 그 ‘취향’ 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한동안은 괜찮을 것 같다.
참고. 단어에 영어를 섞어서 쓴 이유는 어쨌든 이런 담론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 영어였기 때문이다. (AI가 쓴 거 아님. AI가 이렇게 글을 거칠게 쓸 리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