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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 v 페라리 를 본 후의 개인적 잡설

그렇게 기대하던 영화도 아니고, 그냥 극장에 가고 싶어서 보러 간 영화였고, 신나는 영화일 줄 알았다. 물론 고전 레이싱 장면은 그 쇠냄새와 열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처음에 기대한 단순한 짜릿한 레이싱보다, 그 뒷면에서 일어나는 훨씬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고, 나 역시도 대부분의 인상을 받은 것은 그런 장면들이었다.

대기업이란, 그렇다. 이 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내부의 복잡한 역학관계, 지루하지만 딱 떨어질 것 같지만 정말로 생각지도 못하게 변화무쌍하며 그 파장도 큰 곳, 일 하나 하는 것에 많은 곳과 많은 사람이 얽히게 되는 것들, 여러 가지 일을 벌리다 보니 결국은 ‘기업 이미지’가 최우선이 될 수밖에 없는 곳,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소한’ 일의 ‘결과’와 그에 대한 ‘가치’는 희석되어 버리는 곳. ‘일 자체의 아름다움과 결과’보다 ‘그로 인해 기업이 얼마나 돋보일 수 있는가’로 ‘일의 잘 됨’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그 곳만의 생리. 그리고 그 곳에서, 무언가를 되게 해보겠다고 아득바득 버티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 그러면서 그 안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깨닫는 사람들. 그리고 나는 그런 구조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설프게 구경만 하고 옆에서 답답해 하다가 지나갔던 먼 기억들. 너무나도 이 때의 모습과 겹쳐지던 사람들. 복잡한 생각들.

나는 마일스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하지만 어쩌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셸비와 비슷하게는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르망 24 승리 기록 같은 것도 없지만 어쩌면 그래도 돌아본 시늉이라도 낼 수 있을 지는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포드같은 대기업에서 팀을 만들어서 성과내라는 기회 같은 것은 오지 않을 것이다. 가끔 눈 먼 곳에서 어쩌다 부른다고 하더라도 갈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레이스를 달릴 수 있는 근사한 기회가 있다면. 그리고 나와 목적과 가치를 같이 하는, 정말로 잘 달릴 수 있는 동료가 있다면. 그 때는.

아마도, 이루어질 수 없는 머나먼 꿈.

그런 아름다운 기회는 아마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있었는지는 모르겠고 만난 적도 없다. 그런 것은 아마도 정말 훌륭한 사람들에게나 선택적으로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 이런 걸 볼 때마다, 물론 그 끝이 조금은 비극적이고, 가는 길은 내내 답답하고 계속 누군가 방해를 하겠지만, 당연히 결과도 항상 잘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같이 어떤 곳을 달려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런 마음이 들 때는, 가끔 변희봉 배우가 괴물로 칸 영화제에 참석했을 때의 인터뷰의 기사를 읽는다.

이제 다 저물었는데 뭔가 미래의 문이 열리는 것 아니냐 기대감도 생겼다. 힘과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나도 아직은, 괜찮지 않을까.

영화관에 앉아서 광고를 보면서, 보고 나면 NFS가 하고 싶을 줄 알았다. 하지만 보고 나오니, 사람들을 모으고 싶고, 팀을 만들고 싶고, 일거리를 찾고 싶다. 우리가 이렇게 잘 할 수 있어요, 이 가치를 봐요, 정말로 중요한 본질은 이거에요, 라고 뭔가를 해내서 보여주고 싶다. 내가 뭘 잘 할 수 있는 지 알고 싶다. 마음 뿐이라고 해도.

7000 RPM으로 뛰는 어떤 마음. 그 안에서 일렁이는 그리움과 아쉬움.

하지만, 늘 그렇듯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많은 장면들, 좀 더 소중한 어떤 기억과 생각은 말로 옮길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말로 표현하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장 소중한 마음은 비밀이 되어 깊은 속에 갇혀 버린다. 아마도, 영원히.

p.s. 미국 자동차 경영계의 레전드 리 아이아코카가 나오는 부분은 조금 우스웠다. 하지만 뭐, 그 사람도 어쨌든 대기업 시스템에서 변주해서 이끈 사람이니, 아마도 그 시기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는 딱 적당한 정도였는 지도 모른다.

    This post is licensed under CC BY 4.0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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