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농에 대한 소고
1주일에 한 두 번, 약 1.5평의 작은 연습실에 들어선 후부터 두 시간동안 내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거의 동일하다.
들어가서 에어컨을 켠다거나, 아이패드와 안경을 꺼낸다거나, 피아노 뚜껑을 연다거나, 물통을 꺼낸다거나 등등 주변 집기를 정리하고, 잠시 몸을 풀고 숨도 돌리고(대략 연습실까지 20분 넘게 걷는다) 자리에 앉는다. 대략 5분 정도가 지난다.
그리고 50분 정도 하농을 친다.
그 후 5분 정도 좀 쉬고, 다시 50-55분 정도 연습곡을 친다. 그리고 자리 정리를 하고 연습실을 나선다.
이 패턴은 첫 날 이후에는 거의 동일하다 (첫날은 몇십년(?)만에 피아노를 쳤던 지라 연습곡 대신 하농을 두시간 내내 쳤다.)
나에게는 하농은 옛날부터 지금까지도 최고의 손가락 연습용 교과서다. 많은 사람들은 하농을 지겹고, 노래가 예쁜 것도 아니라 시끄럽기만 하다고 싫어했지만, 나는 하농을 싫어했던 기억이 없다. 심지어 기분이 별로 안 좋을 때는 하농 몇 곡을 가능한 최고 속도로 연달아 치면서 기분을 풀기도 했다. 아름다움보다는 손가락의 훈련을 위해서 다소 기계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대부분) 16분 음표의 무한 나열이지만, 나는 이 같은 음표의 무한 나열에서 만들어지는, 메이저3 혹은 메이저 5가 주를 이루는, 단순한 패턴의 반복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다.
보통 50분 정도를 치는 패턴은, 날짜에 따라 홀수/짝수로 나눠서, 보통은 파트2(하농은 파트 3개로 나뉘어져 있고 한 파트당 20곡씩 있다)부터 쭉 친다. 그러면 그 날의 속도에 따라서 다르지만 대충 12-13곡 정도 칠 수 있다. 좀 친 지 오래 되었다 싶은 때는 10번부터 쭉 쳐 나가는 식이다.
처음 5곡 정도 치면, 슬슬 왼손 3-5번 손가락이 마비가 오며 팔이 쭉 땡기고, 오른손도 좀 피곤해진다. 이 때부터가 중요하다. 아아, 신호가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계속 치기 시작하면 슬슬 손에 힘이 풀리면서 손과 팔의 피로감도 사라진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31번.
그다지 특별한 곡은 아니다. 몇 안 되는 왼손과 오른손이 메이저3 음의 차이를 보인다는 것 정도고, 난이도도 크게 있는 것도 아닌 그저 8도 손가락 펼치기를 자랑하는 연습곡일 뿐인데. 이 곡은 31번이지만 홀수/짝수 상관없이 매번 치는 곡이고,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마음에 들던 곡이다. 피아노를 치지 않던 시절에도, ‘하농’하면 언제나 떠올리던 곡. 어렵거나 손가락이 헷갈리는 패턴도 아니어서 이 곡은 첫날부터 다른 곡보다 속도를 주어서 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걸 치고 나서야 아, 내가 하농을 치고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든달까.
그리고 여기에서 잠깐 떠올랐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뒤를 꾸역꾸역 이어나간다. 꾸역꾸역..인 이후는 사실 이 뒤에는 꽤 지루한 파트가 많기 때문이다. 조를 바꿔가며 같은 것을 계속 반복하는 아르페지오라든가, 1번 손가락 옮기는 음계 이동이라든가… 손가락 무한 운동은 이렇지 않은데, 아직 이 조 바꿔가면서 시간을 왕창 들이는 데는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파트3은 좀 재미있기 때문에 얼른 넘어가고 싶은데 파트3에서 지루한 앞부분 좀 지나갈 만 하면 50분이 지나가버린다. 그리고 그 쯤 되면 이미 손가락이 내 손가락같지 않기 때문에 더 칠 의욕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여러 장/단조를 오가는 것, 이 부분을 잘 넘겨야 할텐데, 여기가 정말 중요한데(수많은 실기에서 쓰이는 파트) 이 부분이 이렇게 나에게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손이 다 굳었다고, 누가 어릴 때 배운 건 몸이 기억한다고 했냐고 투덜댔지만 그나마 손가락이 기억한 게 이 정도인 것 아닐까. 악보 읽는 능력은 정말로(그 이후에 피아노 악보는 아니더라도 어설프게 악보를 듣기도 그리기도 했는데도 불구하고) 깨끗하게 날아갔는지, 아직도 피아노를 치면서 조 변경될 때마다 계속 틀린다. 연습곡으로 플랫과 샵이 왕창 붙은 것들을 치다 보니 잘못 치는 경우도 어찌나 많은지. 단순하게 치는 것은 재미있고 쉽지만, 나의 마음은 아직 흑건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고, 머릿속에서 사라진 음표들은 수십년만에 다시 돌아온 내 머릿속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다. 그리고 나의 머리와 몸의 싱크로율이 낮은 것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신체기관 능력이 그 때같지 않을테니 어쩌면 더 낮을테지.
단순한 것을 오래 하는 것에 대해서 별로 질리지 않는다는 것은,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확연한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새로운 것이 아니고, 그저 ‘다시 받아들이는’ 것 마저도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그리고 반복인데, 쉽지 않은 것은 의욕과 재미를 쉬이 잃게 한다.
하지만 일단 그냥 한다. 뭐 내가 얼마나 잘치겠다고. 속도가 느려도 하다 보면 어떻게 될 것이고,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 아니, 안 나아지더라도 더 못하게 되지는 않겠거니. 어차피 요즘에 모든 것을 할 때는 다 이런 마음이니까-
….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지금 돌아보면서 쓰는 말이고, 사실 이 쯤 되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냥 아 하기 싫다 아 그냥 하자 아 5분 후에 쉬는 시간이다 일단 하고 보자 이 정도 생각만 하면서, 한다.
대부분의 일은 그런 식이다. 그리고 이렇게, 후에 돌아보면서나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는 시간을 보내면서 살피면, 나의 손가락은 전보다는 조금 더 강하고 빠르게 바뀌어 있다. 최소한 하농을 1번부터 쭉 치던 첫날보다는 지금의 손가락이 조금 더 잘 움직이는 것 같으니까. 그거면 일단 되었다고 생각한다.